박시윤의 역사답사기행 에세이
(2) 처절한 투사의 땅 북간도

봉오동저수지에서 흐르는 작은 개울이 꽁꽁 얼었다.

1909년 조선에서는 무단통치, 강압 통지가 계속되었다. 일제는 한반도 대토벌을 시작했다. 버틸 곳이 없던 의병 세력들은 비교적 안전한 만주나 연해주로 활동처를 옮겼다. 간도는 오래전부터 가난하고 힘없는 백성들이 범법의 죄를 알고도 살기 위해 들어갈 수밖에 없는 땅이었다. 국경을 넘어 황무지를 일구는 민중의 삶은 처참했다. 굶주림과 싸워야 했고 추위와도 싸워야 했다. 도처에 깔린 죽음의 고비를 넘기며 근근이 목숨을 붙였다. 한편 조선에서는 참고 버티던 백성들이 1919년 3·1 무장 만세운동을 일으켰다. 농민들마저 곡괭이와 호미를 들고 뛰쳐나와 일본에 저항했다. 이 무렵 두만강변 북한과 중국 국경지대엔 팽팽한 긴장감이 맴돌기 시작했다.

 

항일 발자취 따라 삼툰자 마을 찾아
이정표도 팻말도 없이 적막만 가득
신민단 대원들 삼툰자 상촌에 은둔

일본군, 국경 넘어와 수색 작전 돌입
총격전 벌이던 대원들 봉오골 이동
홍범도 장군 뛰어난 유인전략으로
독립연합군, 日軍 격멸하고 대승

봉오동은 철문으로 굳게 닫혀 통제
100년 전 치열했던 승리의 골짜기
이제는 저수지 되어 승전가만 남아

삼툰자 추정 마을. 일광산 아래 작은 마을, 이곳이 삼툰자가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삼툰자 추정 마을. 일광산 아래 작은 마을, 이곳이 삼툰자가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삼툰자를 찾아서

산들은 어깨와 어깨를 맞대고 이어진다. 그 사이로 두만강 물줄기가 낮게 흐른다. 남쪽은 함경북도 종성군 강양이고, 북쪽은 중국 땅 도문이다. 해가 서쪽으로 넘어갈 무렵 일광산 자락 아래, 어느 땅에 당도했다. 이정표도 팻말도 하나 없는 타국의 들판은 적막으로 가득했다. 삼툰자는 어디인가? 조용히 지세를 살피던 길잡이 양진오 교수가 한쪽을 가리켰다. 일행은 모두 길잡이가 가리키는 곳, 어떤 처연함이 서린 곳을 바라보았다. 겨울 저물녘의 시골이 모두 그렇겠지만 삼툰자는 서글픔마저 묻어났다. 세월에 묻혀 잊히는 듯, 희미한 안내조차 없는 들판은 적막하기만 했다.

두만강을 등지고 서니 일광산 아래 몇 안 되는 집들이 폐허의 풍경처럼 다가온다. 두만강을 건너온 시린 바람이 어둑어둑한 들판을 휘감을 무렵 ‘처절한 전투’ 그리고 ‘죽음’이라는 단어가 먼저 뇌리를 스친다. 나라를 빼앗긴 사람들이 처절하게 항거했던 땅. 삼툰자는 독립투사들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우리에게 그런 의미의 땅이기도 하다.

지금은 간평촌으로 불리는 삼툰자는, 조선 강양에서 김·박·최 씨 세 성(聲)이 두만강을 도강하여 각각 한마을씩, 세 개의 씨족 부락을 이루면서 붙여진 이름이다. 삼툰자가 들어선 땅은 아무도 살지 않는 황무지였기에 세 집안이 터를 잡기에는 그만이었다. 모두 피를 나눈 가족 마을이니 밀정이 붙을 리 만무했다.

두만강 넘어 간도 땅에 독립군이 있다는 것을 안 일본군은, 독립군이 조선으로 들어오는 것을 막겠다는 이유로 접경지역인 함경북도 온성군 남양 두만강변에 대규모 진을 쳤다.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조선 독립군과 일본 남양수비대가 대치한 셈이었다.

일광산에 오르면 두만강 건너 온성군의 산천이 한눈에 들어왔다. 독립군은 온성군 일대에 진을 친 남양수비대의 동태를 한눈에 파악하고 있었다. 1920년 6월, 청년 독립군 신민단 대원들은 두만강을 건너가 일본 국경초소, 일제 통치기관을 차례대로 습격하며 남양수비대와 수시로 교전했다.

 

삼툰자에서 두만강 건너 조선 남양. 일본군 남양수비대와 일제 관공서가 있었다.
삼툰자에서 두만강 건너 조선 남양. 일본군 남양수비대와 일제 관공서가 있었다.

두만강 물이 얕아 도강이 쉬웠고 산과 골짜기로 이루어진 강양 일대는 지형에 능통한 독립군들이 움직이기에 자유로웠다. 독립군의 습격이 점점 거세지자, 약이 오를 대로 오른 일본군은 두만강을 건너 국경을 넘어 중국 땅으로 진입했다.

일본군은 민간을 수색하다가 조선인이면 임산부, 아이, 노인 할 것 없이 무고한 백성의 목숨을 거리낌 없이 앗아갔다. 이때 신민단 대원들은 삼툰자 상촌에 은둔하고 있었다. 삼툰자 하촌을 공격하던 일본군은 신민단 대원들을 쫓아 상촌까지 바짝 추격했다.

◆저수지가 된 봉오동전투 격전지

삼툰자에서 일본군과 총격전을 벌인 신민단 대원들은 고려령을 넘어 봉오골로 이동했다. 삼툰자에서 손실을 입은 일본군은 대규모 병력을 갖추어 ‘월강추격대’를 편성했다. 그들은 두만강을 건너 곧장 고려령을 넘어 독립군의 숨통을 죄며 봉오골로 향했다. 자비란 한 방울도 없는 월강추격대의 무서운 추격이 시작되었다. 독립연합군의 홍범도 장군은 월강추격대가 봉오골로 올 것을 예측하고 주민을 먼저 피신시킨 뒤 최진동, 안무 등 독립군 연합부대(대한군북로독군부)와 함께 각 고지에 병력을 매복시켰다. 지형에 능했던 신민단 대원들은 삼툰자에서 약20km 떨어진 봉오골 상촌까지 월강추격대를 유인해 갔다.

“나라 뺏긴 설움이 우리를 북받치고 소총 잡게 만들었다 이 말이야”

-영화 봉오동전투 “해철(유해진)의 대사 중-

봉오동은 입구에서 안쪽까지 수많은 골짜기로 이루어졌고, 마치 삿갓을 뒤집어 놓은 것과 같은 지형이라 한다. 독립군의 매복에 대해 철저한 준비를 한 일본군은 척후병을 봉오골로 먼저 들여보냈다. 하지만 독립군은 척후병을 공격하지 않았다. 의병이 없다는 듯 속여 월강추격대의 본대가 상촌 중심부로 들어오도록 유인했다. 봉오골은 사면이 야산으로 둘러싸인 협곡으로 이루어진 천연 요새였다. 본대가 봉오골 중심부로 들어오자 4면의 고지에 매복하고 있던 독립군연합부대는 일제히 공격을 퍼부었다.

봉오동전투는 거의 4시간 동안 이루어졌다. 하늘도 독립군을 도운 것인지, 오후 4시 무렵 갑자기 하늘에서 번개가 치고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거센 폭우에 피아식별이 어려워지자 월강추격대는 자국의 후원부대와 서로 적으로 오인하여 총격전까지 벌이다 많은 사상자를 냈다. 월강추격대는 조선 온성으로 급히 퇴각했다. 뺏기지 않으려고 지키려고 목숨을 건 독립군과 뺏으려고 독기를 품은 일본군 사이에서 선(善)은 악(惡)을 이겼다.

봉오동전투 승전 소식은 한반도 조선까지 순식간에 퍼졌다. 모두가 싸워 망국의 설움에서 벗어나고자 할 때 봉오동 승전 소식은 조선 국민에게 큰 등불이 되었다. 독립군의 첫 승리 소식을 듣고 죽기를 각오한 많은 동포가 만주 간도, 연해주로 이주해 독립군에 입대하는 계기가 되었다.

 

봉오동저수지입구. 봉오동전투의 접전지는 저수지가 되어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봉오동저수지입구. 봉오동전투의 접전지는 저수지가 되어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독립군 수는 셀 수가 없어, 왠지 알아? 어제 농사짓던 인물이 내일 독립군이 될 수 있다 이 말이야.”

-영화 봉오동전투 “해철(유해진)의 대사 중-

봉오동으로 가는 내내 두만강은 우리와 함께 했다. 두만강 건너 북한의 강양 마을도 함께 따라왔다. 국경은 차갑고 이국은 낯설지만 강 건너 강양, 우리 땅은 반갑다.

봉오동에 도착하니 굳게 닫힌 철문이 일행을 막아선다. 상기된 표정들, 무심한 듯 세심한 눈빛들은 이미 철문 넘어 골짜기를 응시한다. 모두 말이 없다. 100년 전, 선조들의 치열했던 격전지를 찾아 타국으로 온 이방인들의 발길이 묶이는 순간이다. 눈앞에 두고 선조들의 숨결을 더 따라 밟을 수 없는 아쉬움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좁은 협곡이 많았던 봉오동은 저수지가 되었다.

어디선가 졸졸졸 물 흐르는 소리가 난다. 봉오동 저수지 쪽에서 작은 개울이 흐르고 있다. 독립을 위해 치열하게 살았던 무명의 이름들이 흐르고 있는 듯하다. 봉오동 승리의 골짜기는 이들의 투혼과 이름을 품고 저수지에 고요히 잠겨 있다.

글·사진/박시윤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