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미영 수필가
정미영 수필가

연일 내린 비가 잦아들자마자 오어지 둘레길을 걷는다. 1시간 30분 정도 소요된다는 둘레길을 이제껏 한 번도 무결하게 걸어본 적이 없다.

고즈넉한 오어사 경내를 둘러보고 원효교를 지날 때까지는 호기롭게 걷지만, 둘레길의 반 정도에서 발걸음을 되돌려 나오기 일쑤였다.

오늘은 겨울 끝자락의 비바람에 대비해 모자를 쓰고 장갑을 챙기면서 기필코 끝까지 걷겠다고 다짐한다.

얼마 전, 포스코갤러리에 다녀왔다. 특별기획전 ‘숲에서 발견한 위로 : 이너피스’전을 관람하기 위해서였다. 전시실을 산책하듯 여유롭게 거닐었다. 첫 번째 여정인 사유의 숲을 지나 두 번째 여정인 치유의 숲에 도달했다. 실제 연주자 없이 빛과 소리가 어우러져, 피아노에서는 드뷔시의 ‘달빛’이 연주되고 첼로에서는 생상의 ‘백조’가 흘러나와 공간을 채웠다. 건물 안에 따뜻한 공기의 질감이 느껴지는 듯하더니, 공기 입자가 관람객을 따라 리드미컬하게 춤을 추는 것 같았다.

내 마음에 젖어든 ‘숲’의 기운을 음미하며, 마지막 여정인 동화의 숲에 다다랐다. ‘나만의 앨리스’를 찾아보라는 문구를 시작으로 상상력을 자극하는 설치미술이 조성되어 있었다. 루이스 캐럴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앨리스가 이상한 나라의 모험을 통해 자기 발견을 하는 여정이 펼쳐진다. 다양한 인물과 일을 경험하면서 자아를 찾고 자신의 용기와 삶의 지혜를 키워나간다.

문득 한 달 전에 남미 등반을 다녀온 옛 제자가 떠올랐다. 그는 대학 산악부 소속으로 남미 아콩카구아를 등반하기 위해 5명으로 YB원정팀을 꾸려 가족과 산악대원들의 응원을 가슴에 간직한 채 한국을 떠났다가 무사히 귀국했다. 나는 A4용지로 30쪽이나 되는 등반보고서를 운 좋게 읽어볼 기회가 생겼다.

첫날의 여정을 살펴보니 인천공항을 떠나 아디스아바바, 부에노스아이레스를 거쳐 멘도사에 도착하기까지는 약 50시간의 비행 후에 땅을 밟을 수 있다고 했다. 시작부터 그들의 비행시간에 입이 떡 벌어졌다.

등반보고서를 다 읽었을 때쯤에는 눈물 콧물 범벅이 되어 혼쭐이 났다. 베이스캠프에서의 고된 생활과 고소증을 피하거나 극복하기 위한 노력, 컨디션 난조로 몸과 마음이 지친 모습, 날씨를 살피며 등정 일정을 계획하느라 무작정 기다리던 일, 아콩카구아 정상을 밟은 자와 고소 증세로 정상을 밟지 못한 자들의 심리 등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모든 광경을 상상해본 나는 가슴이 먹먹했다.

등반보고서 말미에 적힌 글이 인상 깊었다. “산악부에 참여한지 2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 동안 저에게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선배님들의 뒤만 쫓아가기 바빴던 파키스탄 PK39 BC트레킹부터 대장을 맡은 북알프스 종주, YB 아콩카구아 원정대의 일원으로 등반까지. 그 외에 산악부에서 보낸 크고 작은 순간이 쌓여 지금의 제가 되었습니다. 산악부가 제 삶의 전반을 바꾸었습니다. 산악부에 몸담으며 세상을 이겨 낼 훌륭한 무기를 많이 얻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부족하니 성실하게 노력하겠습니다.”

앨리스는 이상한 나라에서의 모험을 통해 자신을 성장시켰다. 이상한 동물들과 마주했던 경험을 통해 자신을 향한 믿음과 용기를 되찾고 삶의 지혜를 터득했다. 그도 산악부의 일원으로 등반에 참여하면서 예상치 못한 시련에 부딪혔을 때 슬기롭게 극복하며 환경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내면을 단단하게 성장시켰을 것이다.

내 삶의 궤적을 돌이켜본다. 나는 인생의 숱한 고비마다 어떻게 건너왔었나? 삶에서 생겨나는 문제의 답은 대부분 내 안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현실의 혼돈과 두려움이 싫어 회피하려던 순간이 떠오른다. 만약 앞으로 나에게 고난이 찾아온다면 앨리스처럼, 옛 제자처럼, 자아의 내면 깊은 곳으로부터 들려오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용기를 내어 현명하게 대처해야겠다. 또한 나의 가능성과 역량을 시험해 보는 일에 새로운 시각으로 도전하리라.

나는 지금, 내 안의 이상한 앨리스를 찾기 위해 둘레길을 묵묵히 걷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