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영 ​​​​​​​대구가톨릭대 교수
박상영 ​​​​​​​대구가톨릭대 교수

설 명절이 지났다. 으레 즐거워야 할 음력설을 쇠고 나면 대한민국 곳곳에선 앓는 소리로 가득하다. 즐거운 마음으로 가족, 친지를 방문했다가 덕담(?) 아닌 독담(毒談)을 한 바가지 듣고 온 탓이다. 취준생에게 취업 이야기, 입시생에게 학업 이야기, 다른 형제자매와의 비교, 결혼 이야기, 난임으로 걱정인 부부에게 출산율 이야기, 여기에 더해 본인들 자랑질까지. 풀 세트로 받고 나면 그야말로 즐거워야 할 명절이 생지옥이 돼버리는 건 당연지사. 즐거운 시간만으로도 부족한 설, 왜 이렇게 아웅다웅하는 일이 많아진, 천덕꾸러기 명절이 돼버린 것일까?

설은 ‘신(新·새로운)’의 의미를 지닌 순우리말로, 한해가 시작되는 새날 곧 설익은 시간을 의미한다. 익숙했던 시간을 지나 낯선 시간으로의 첫걸음을 떼는 날인 것이다. 우리는 보통 새로움 앞에서 긴장하고 설레기도 하지만, 동시에 불안에 떨며 초조해하기도 한다. 이런 불안함은 새해 전날 잠자면 눈썹이 센다고 믿으며, 밤새는 풍속을 만들어 내기도 했다. 즉 잠을 자지 않으면 날짜가 바뀌지 않을 테고, 낯선 생경함과 불안을 느낄 필요가 없으리란 믿음의 결과였던 것이다. 그만큼 우리는 익숙한 것이 좋지 새로운 것은 두렵고 불편하다. 그 불편한 날, 우리는 바로 가장 편안하고 마음의 안정을 주는 가족과 친지들을 만나는 것이다. 그것이 설날이다. 즉, 새로움에 대한 두려움을 혼자 감당하는 것이 아니라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 감당하는 것, 서로에게 덕담을 건네며 설 차례도 지내면서 말이다. 미지의 시간이자 불안한 새해를 축하하되, 조상과 후손들이 한 자리에 모여서 서로 소통하는 의식의 시간인 설.

그렇기에 전통 사회에서는 이렇게 뜻깊은 날을 단 하루로 마감하지 않았다. 보통은 정월대보름까지 큰 신년 의례 기간으로 보았고, 이 기간에는 일월(日月)에 예를 표하기도 했고, 왕에게 도움을 준 동물들(돼지, 쥐, 말, 까마귀)에 대해 고마움으로 12띠 동물날을 정해 기념하기도 했다. 이 중 까마귀는 띠동물은 아니지만 ‘오기일’이라 하여 찰밥을 차려 특별히 고마움을 표했는데, 이 오기일은 다른 말로 슬퍼한다는 뜻의 ‘달도(<601B>悼)’라고도 불렀다. 이는 익숙함에서 낯섦으로 전환되는 기간의 정점인 보름까지는, 새로움에 대한 불안함으로 슬프고 걱정되니, 모든 일을 금하고 삼가 조심하며 꺼리는 ‘신(愼·삼가다)’의 기간으로 간주했음을 의미한다. 해서, 우리 선조들은 설날 호들갑스럽게 떠들거나 자랑 또는 타인에게 스트레스를 주는 행동 따위는 하지 않았다. 그것은 남에 대한 배려가 아닐뿐더러 스스로에게도 합당하지 않는 일이자 새해맞이 태도가 전혀 아니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즘, 이렇게 편안함을 나누며 조심스레 불안함을 떨쳐야 하는 중요한 날, 덕담 아닌 독담을 주고받는다면 기분이 어떨까? 그것도 가장 가까운 가족과 친지들로부터라면?

바야흐로 설은 막 지났다. 그러나 아직 보름까지는 며칠 더 남아 있다. 현재 여러 이유로 명절 증후군을 끙끙 앓는 많은 이들, 이 新의 시간을 스스로 삼가고 자숙하는 愼의 시간으로 되새기는 노력을 해 보면 어떨까. 아마 푸른 청룡의 해가 보다 더 의미 있게 다가올지도 모를 일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