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규 경북대 명예교수
이상규 경북대 명예교수

백석(1912~1996)은 평북 정주에서 태어나 일본 유학을 다녀온 후 경성에서 영어 교사로 지내다가 만주 일대를 유랑하며 작품을 발표했다. 향토색 짙은 토속적인 소재를 평안도 방언으로 재구성해낸 탁월한 시인이었다. 해방 이후 고향에서 시작에 전념했으나 ‘사상 이외 문학성도 중요하다’는 그의 신념 탓에 1957년 즈음 북한 문단에서 숙청되었다. 협동농장으로 추방되어 시쓰기를 중단한 후 농부로 암흑의 삶을 살다가 1996년에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사슴’(1936),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1938), ‘서행시초’(1939) 등의 시집과 동요집을 남겼다. 그의 시는 모두 일제강점기에 쓰였고 시집들도 그때 발간되었다. 그가 경성에 머무는 동안 만났던 그의 영원한 연인 기생 김자야와의 짧고도 영원한 사랑의 이야기는 우리들의 심금을 울려준다.

그의 시는 전통적인 고향마을의 생활 속 소재들인 동식물, 민속, 음식 등 전반에 걸쳐 방언 시어들의 파편이 군락을 형성하고 있다. 나라를 잃은 한 예술가가 탐해온 아릿하게 멀어져 가는 옛것에 대한 습속과 습성과 대상이 고향이라는 한 정점에 몰려 있다. 옛것에 대한 그리움으로 지향하는 구심력과 동경과 경성이라는 모던한 현실 사이의 팽팽한 긴장감이 그의 시작품 속에는 옛것과 추억과 현재성이 보석처럼 알알이 박혀있다.

그의 대표작이라고도 할 수 있는 ‘가즈랑집’이라는 시는 고향 촌락의 다양한 추억과 전설이 함께 어울려 빚어내는 작품이다. ‘가즈랑집’은 이 작품의 배경인 셈인데, 오래되었고 낡아 귀신이 금방이라도 튀어 나타날 듯한 집이다. 시인의 유년 시절의 추억인 가즈랑 고개의 무당 할머니가 살았던 추억의 현장이다. 쇠메를 든 도둑과 ‘승냥이’가 출몰할 만큼 외딴 집이다. 아슴한 기억의 공간을 배경으로 얽힌 몇 가지 에피소드로 엮어진 서사적 구성을 하고 있다. 그런데 지금까지 ‘가즈랑집’이 단순한 가즈랑 고개에 있는 낡은 집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렇지 않다. 이 ‘가즈랑’의 어원은 일본어 ‘가스라(かずら,葛·蔓)’이다. 칡덩굴이 뒤덮여 있는 오래되고 낡은 집이라는 뜻이다. 산짐승인 승냥이가 슬며시 지나가고 가끔은 산적도 출몰했던 가즈랑 고개에 얽힌 전설같은 추억으로 서사화된 작품이다. 교묘하게 ‘가스랑 고개’와 칡덩굴을 뜻하는 일본어 ‘가스라’가 일치하는 배경이다.

산짐승이 가축을 물어간 이야기를 들려주던 신당집 가즈랑 할머니가 태어나자마자 시렁에 올리면서 명이 길게 오래오래 살도록 시렁귀신에게 수양아들로 팔았다는 시인의 태생적 비밀과 성장하면서 경험했던 시골 토속 음식을 기억한다. 유년기의 경험인 “울다가 웃으면 밑구멍에 털 난다”는 개구쟁이 어린 시절의 추억을 불러와 과거와 현재를 가로세로로 서사를 얽어낸다. 그 이야기 속에는 토속적인 방언들로 꼭꼭 메워져 있다. 이 시에서는 동물이나 식물 이름, 음식 이름, 가옥 이름, 민속과 관련된 이름 하나하나에서부터 질병 이름, 놀이 이름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한 평안도 방언들이 나타난다. 마치 평안도 민속어사전이라고 할 정도로 다양한 토속어가 오롯이 모여서 한 편의 작품을 구성하고 있다.

깽제미(꽹과리), 구신집(귀신집), 당즈깨(당세기, 고리짝), 수영(수양, 데려다 기른 아들이나 딸), 아르대즘퍼리(아래쪽에 있는 진창의 펄)는 평안도 사람이 아니면 그 뜻을 새기기도 힘든 방언들이다. 돌나물김치나 백설기, 도토리묵과 도토리범벅은 알 만한 음식이름이다. 그러나 제비꼬리, 마타리, 쇠조지, 가지취, 고비, 히순, 물구지우림, 둥굴레우림, 광살구, 당세는 식용 나물이거나 독초를 식용으로 가공한 나물음식의 이름을 평안도 사람이 아니면 누가 알까. 백석의 시에는 특히 평안도의 가옥구조와 관련된 매우 다양한 방언이 등장한다. ‘가즈랑집’을 비롯하여 옛 가옥을 구성하는 다양한 시어로 그려내는 마을의 골목골목이 정겹다. ‘곱새녕(이엉), 곱새담(풀, 짚으로 엮은 담), 돌 능와집(얇은 돌조각으로 이은 지붕), 딜옹배기(아주 작은 자배기), 섬돌(토방돌), 아르·(아랫목), 아릇간(아랫방), 울파주(대, 수수깡, 갈대, 싸리 등으로 엮어놓은 울타리), 재통(변소), 마가리(오막살이), 국수당(서낭당)’과 같이 옛날 서민들이 살았던 산골마을의 민속적인 전경이 펼쳐진다. 칡덩굴이 뒤덮인 외딴집 ‘가즈랑집’을 중심으로 하나의 민속마을을 복원해 낼 수 있을 정도로 다양한 평안도 방언이 구사된 백석의 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