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미케네 유적 복원현장.
그리스 미케네 유적 복원현장.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 된다. 얼마나 끔찍한 말인가. 인류 발전과 도약에는 반드시 폭력이 동반되었다. 따라서 역사는 흥미로 접근하나 끝내 기억에 상처를 남기게 마련이다. 인류가 남긴 위대한 문화유산 앞에서 광휘의 찬사만을 보내기보다, 하층민 피땀을 기억하여야 한다. 우리가 진실이라고 믿었던 역사, 그동안 잊힌 사연에서 미래를 위한 교훈 한 자락 찾을 수 있기를 기대한다. 현대는 치졸한 민족 우월성 보다 상생의 지혜가 필요한 시대니까. /편집자 주

기원전 6천 년경 토착민과 소 아시아계 민족이 이동해 어울려 살던 그리스 땅에 지금의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이들이 밀려오면서 박힌 돌을 뽑아냈다. 제우스 형제들이 크로노스와 티탄족을 물리쳤다는 그리스 신화는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뽑아낸 과정에서 탄생한 이야기다.

그리스는 진정 신성의 땅이다. 이들에게 있어 신화는 성경만큼 진실인 까닭이다. 신들의 제왕 제우스, 가정의 수호신이자 제우스 아내 헤라, 태양 신 아폴론, 지혜와 전쟁의 신 아테나, 미의 신 아프로디테, 바다의 신 포세이돈, 달과 사냥의 신 아르테미스 등 이외에도 헤아리기 힘들 만큼 많다. 신화는 이곳에 살았던 사람들 정신세계를 가늠하는 잣대가 되기도 한다.

그리스는 산악지형으로 본토를 비롯해 여러 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기원전 3000년부터 기원전 2000년 동안 에게해를 중심으로 청동기 문화가 발달하였다. 중기 청동기 크레타섬에 일명 미노아문명과 뒤이어 그리스 본토에서 발현된 미케네문명, 즉 에게해를 둘러싸고 형성된 이 두 문명을 합쳐 ‘에게문명’이라고 부른다.

그리스에서 가장 큰 섬 크레타는 오리엔트 세계를 비롯해 예술과 과학, 상형문자까지 창제한 이집트 영향을 받으면서 해상왕국으로 번영을 이룬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반인반우 미로타우로스를 가두기 위해 지었다는 ‘크노소스궁전’이 있는 곳이다. 아버지 다이달로스의 당부를 잊은 채 태양 가까이 올라 밀랍이 녹아 바다에 빠진 이카로스 전설도 이곳에서 시작한다. 이처럼 전설 속에서만 존재했던 이야기가 1900년 영국인 고고학자 아서 존 에번스에게 발견된 후 신화와 역사가 뒤섞이며 사람들 상상력을 자극하기에 이른다.

화려했던 크레타 문명은 BC 1400년경 산토리니 화산 대폭발과 지진, 해일 등 자연재해 앞에 속수무책 식물 상태로 접어든다. 설상가상 그리스 본토에서 기세를 떨치던 미케네 침략으로 역사에서 영원히 사라지고 말았다.
 

그리스 미케네 유적지
그리스 미케네 유적지

크레타 문명에 결정타를 가한 미케네문명은 BC 2000년경 중기 청동기에 발칸반도 북쪽 아카이아인이 남하해, 중부 그리스와 펠로폰네소스 반도에 둥지를 들면서 시작되었다. 앞선 크레타문명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미케네는 BC 1500년 전부터 강력한 해양기술을 바탕으로 지중해 동부 해상교역권을 장악하며 승승장구한다.

호메로스가 쓴 ‘일리아스’에서 트로이와 전쟁을 일으킨 그리스 연합군 총사령관 아가멤논도 이곳 미케네 왕이다. 이 대서사시는 전설 속 이야기였다. 트로이 원정과 관련된 신화를 소개한다. 아가멤논은 명궁이었다. 그는 사냥 중 “사냥의 신 아르테미스도 나보다 못할 것이다”라며 입방정을 떨어 아르테미스 노여움을 샀다. 트로이 정벌을 위해 그리스 바다에 정박했던 배들이 출정하려 했지만, 역풍이 불어 도무지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이때 예언자가 아르테미스 노여움으로 인해 그런 것이니 아가멤논 외동딸 이피게네이아를 제물로 바쳐야 한다고 했다. 아가멤논은 딸에게 아킬레우스와 결혼을 시키려 한다고 속여 바닷가로 데리고 온다. 사정을 안 아내 클리타임네스트라가 뛰어와 울면서 사정한다.

“당신은 자식을 제물로 바치며 뭐라고 기도할래요? 수치스러운 출발에 걸맞은 비참한 귀향을 빌래요?”

아내 절규에도 아가멤논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결국 이피게네이아는 제단에서 머리에 화관을 쓰고 예언자 칼을 받았다. 그녀 역시 죽기 전 아버지 앞에 엎드려 살려달라며 눈물로 호소했다.

“때가 되기도 전에 저를 죽이지 마세요. 햇빛을 보는 게 저는 달콤해요. 땅 밑을 보도록 저를 강요하지 마세요.”

마치 슬픈 노랫말처럼 오래도록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하지만 아가멤논이 딸에게 스스로 제물이 되지 않으면 그리스 군사들에 의해 도륙당할 것이라고 엄포를 놓았다. 그러나 아가멤논은 전쟁에서 돌아와 아내 클리타임네스트라와 그녀 정부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클리타임네스트라 역시 자신이 낳은 아들에게 최후를 맞는 비극이 벌어진다. 욕망은 부모와 자식, 천륜, 자연이 맺어준 정마저도 더럽히게 되나 보다. 결국은 호메로스가 천재다.

각설하고, 이렇게 찬란했던 미케네도 기원전 1100년경 북쪽에서 철기문명으로 무장한 도리아인이 남하하기 시작하면서 운명에 마침표를 찍는다. 달마티아, 알바니아 지방에서 몰려들기 시작한 이들은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중심으로 한 인근 섬을 근간으로 스파르타 등 여러 도시국가를 건설하고, 소아시아는 물론 이탈리아 등지에 식민지를 개척하는 기염을 토한다. 고대 그리스 사람들이 이들을 일러 헤라클레스 자손의 귀환이라고 했다.

도리스인들은 거대한 돌기둥에 세로줄의 홈이 있는 도리아 양식을 발전시켰고, 훗날 로마 건축에 모태로 거듭난다. 실용적이며, 튼튼한 구조로 인정받는 콜로세움 아래층 기둥도 도리아 양식을 비롯해, 도리스식 신전의 극치로 인정받는 아테네 파르테논신전만 봐도 알 수 있다.

/박필우 스토리텔링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