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대왕자태실

양쪽으로 소나무가 도열한 돌계단을 오른다. 하나하나 밟을수록 맑은 기운이 폐부 깊숙이 들어온다. 알처럼 둥근 봉우리 위에 오르니 돌로 만든 항아리들이 봉긋봉긋 솟아있다. 세종대왕 왕자들의 탯줄을 담은 열아홉 개의 항아리다. 자손 탄생의 기운과 왕조를 이어가려는 기원이 서려있는 태실이다.

예로부터 태는 태아의 생명력을 부여한 것이라 여겨 소중하게 여겼다. 자른 탯줄도 생명의 일부라 생각하고 함부로 버리지 않았다. 특히나 왕족의 태는 국가의 운명과 관련이 있다고 여겨 전국의 명당에 안치했다. 천지인이 모인 곳에 태를 봉안해 하늘과 땅의 기운의 영향을 받기를 바랐다. 모난 기단석은 땅을, 연꽃을 새긴 둥근 뚜껑 모양의 돌은 하늘을, 그 사이에 있는 중동석은 인간을 상징한다.

이곳 세종대왕자태실은 풍수지리에서 말하는 명당이다. 태실을 한 바퀴 돌며 주변의 산수(山水)를 살펴본다. 선석산이 병풍처럼 뒤를 둘러싸면서 산줄기가 좌우로 뻗어 알처럼 생긴 태봉을 보호하고 있다. 어미새가 온몸으로 알을 품는 지형이며 사람으로 보면 여자의 자궁과 생김새가 닮았다.

“들어냅시다.” 의사는 기어이 없애자고 했다. 한 번의 유산 후 좋지 않았던 자궁은 하혈을 끝도 없이 했다. 찾아간 병원에서 자궁 속에 커다란 혹이 자라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나는 살기 위해 자식을 품었던 곳을 내어 놓기로 했다. 수술대 위에 올랐다. 3시간이 지나 수술실에서 나온 나는 사막에 버려진 꽃처럼 기운을 차리지 못했다. 뱃속에 가득 고인 나의 혈액은 심장 박동을 올렸고 혈압을 내렸다. 기어이 혈압이 잡히지 않았고 큰 병원으로 이송되어 소생실로, 또다시 수술실로 옮겨졌다. 눈을 뜨지 못할 수도 있다던 의사의 예고에 멀리 있던 가족이 모였다. 생명이 꺼질 뻔했던 나는 타인의 피를 받고서야 깨어났다.

여자의 몸은 생명의 시작이다. 아이들의 출발점이었던 우주가 나에게서 빠져 나갔다. 휑한 빈자리만큼 내 마음에도 구멍이 났다.

더는 생명을 품을 수 없다는 상실감은 정체성까지 뒤흔들었다. 태초에 엄마의 자궁 속에서 이미 여자임을 품고 나왔지만 더 이상 알을 품을 수 없다는 처지에 이르자 허전함이 밀려들었다. 생명은 신비하다. 다른 태를 걸고 나온 두 개의 생명체가 몇 겁의 인연으로 만난다. 둘은 하나가 된다. 하나의 생명이 태를 안고 또 다른 세상을 영접한다. 생명은 알과 태와 알을 통하여 순환하며 대를 이어간다. 포유류에게 탯줄은 생명과 생명을 잇는 끈이다. 과거에서 현재까지 탯줄과 탯줄로 이어지고 현재에서 멸종까지 암컷의 몸을 통하여 생명이 이어진다. 탯줄은 존재와 존재 사이의 건널 수 없는 단절된 거리를 이어준다. 알 속의 생명은 어미의 탯줄을 통해 모든 것을 공급받고 완전체가 되어 알을 깨고 나온다.

생명은 세상을 활기차게 한다. 바삐 움직여 꿀을 만든 벌 덕분에 꽃은 씨와 열매를 잘 맺는다. 민들레가 자신의 아름다움을 잘 뽐내도록 봄이 바삐 온다. 잘 품은 알이 세상에 잘 깨고 나오도록 여인의 몸은 태를 통해 알을 품는다. 모든 씨앗이 알의 형상으로 묻히고 해가 바뀌면 땅은 알을 품어 새로운 생명으로 움트게 한다.

김경아 작가
김경아 작가

알은 생명과 생명을 잇는 연속성의 집합체다. 그 연결고리가 되는 탯줄을 알처럼 생긴 봉우리에 보관한 것 또한 영속성을 바라는 마음에 있다. 내가 존재하는 이유도 이러한 연결의 연장선에 있다. 나는 여자로서 생명의 지속에 공헌했고 그 연속성 가운데 오늘의 내가 있다.

씨앗을 받아 생명을 잉태해 열 달을 품었다. 아이를 낳고 마음으로 품고 길러 더 넒은 세상으로 내보냈다. 나간 자식은 가끔 돌아와 편안하게 쉬었다 간다. 그러고 보면 사람은 다 명당에서 태어나고 내 몸은 명당의 역할을 한 셈이다.

자궁이 빠져 나간 자리에 이제는 무엇을 품을까. 모성을 되살려 이제는 사람을 마음으로 품기로 한다. 거대한 우주의 모체는 여자이며 여자가 알을 품는 곳은 모두 명당이 아닌가. 돌아오는 길, 생명 탄생의 원리가 숨어있는 봉우리를 한 번 더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