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영 ​​​​​​​대구가톨릭대 교수
박상영 ​​​​​​​대구가톨릭대 교수

얼마 전, 향후 모 기관 평가를 위한 주요 안건 처리 모임에 참석한 적이 있었다. 오래전부터 해결되지 않은 케케묵은 안건 하나가 있었는데, 마침, 회의 테이블에 올라왔다. 위원 중 한 명이 먼저 꽤 괜찮은 의견을 내었다. 그런데 회의를 주관하던 기관장이 그 의견을 들어보니, 말은 맞고 합당한데, 따르자니 본인 소관인 내부 부서원들의 반발이 만만치 않을 것 같은데다 그렇잖아도 컨트롤이 잘 되지 않아 속앓이를 앓던 터라, 불편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때, 좋은 방향을 생각하며, 나도 덧붙여 한마디 했더니, 다들 동요할 것 같았는지, 갑자기 기관장이 버럭, 그게 쉽지 않은 문제인데다 다들 마땅한 대책이 없는 것 같다며 서둘러 안건을 정리하려 하였다. 그 목소리 톤과 권위적인 태도에 다들 쥐 죽은 듯, 눈치만 보다가 ‘예’하고 일제히 숙이는 게 더 가관이었다. 졸속 행정, 이건 아니다 싶어, 한마디 더 하니, 아까보다 더 큰 소리로 못 박는 게 아닌가. 그러자 다들 아까보다 더 충성스러운 태도로, ‘예’하던 모습이란! 대책이 없는 게 아니라, 구렁이 담 넘어가듯, 교묘히 싫은 것을 감추며 일을 졸속으로 마무리 지으려는 속이 빤히 보였건만, 다들 권위에 굴복해 버리니, 참, 마음이 헛헛했다.

장탄식(長歎息)을 하고 운전하고 돌아와 지인과 저녁을 먹으며 그날 일을 이야기했다. 그랬더니, 지인의 말이 더 가관이었다. ‘너도 참…. 세상 순진하기는! 그게 바로 인간이야. 공부한다더니, 인간 공부 안 하고 무슨 공부했냐.”는 핀잔만 잔뜩 듣고서, 허, 참. 깊어가는 가을, 많은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1597년 2월, 한양에서는 원균의 모함으로 이순신에 대한 국형장이 한창이었다. 문무백관 200여 명이 모두 그를 죽여야 한다고 일제히 아우성칠 때, 심지어, 이순신을 크게 추천한 유성룡마저도 선뜻 못 나서던 그때, 혼자 ‘아니오’를 외친 한 사람이 있었다. 바로 영의정 이원익. 그 결과, 이순신은 살 수 있었고 풍전등화 속 나라를 구한 명장으로 남을 수 있게 되었다.

또 연산군 때, 환관 김처선은, 감히 두려워 아무도 말 못 할 때, 이토록 음탕한 임금은 보지 못했다며 직언(直言)하다 목숨을 잃었다. 화난 임금이, 그를 죽인 후에도, 그 집안을 멸족하고, 그 이름자 중 하나인 ‘처(處)’자 사용을 금지함은 물론, 동명이인들은 개명하라는 명까지 내렸으니. 게다가 처용무의 이름도 풍두무(豊頭舞)로 바꾸고, 과거 시험에서 처(處)자를 썼다고 합격을 취소한 일까지 있었으니, 실로 ‘아니오’를 외친 댓가가 크긴 했다. 그러나 다들 ‘예’라고 할 때, 환관으로서 ‘아니오’를 외칠 수 있었던 그 마음은 대단하지 않은가.

어느덧 11월이다. 모두가 ‘예’라 할 때, 아닌 것을, 아니라 할 수 있는 것, 그것은 ‘용기’이다. 누군가는 이 용기가 사회에 꼭 필요한 것이라 하고, 또 누구는 그런 용기를 부리다 꺾이고 지쳐 너덜너덜해질 테니, 그냥 그대로 사는 게 좋다고도 한다. 선택은 각자의 몫이겠지만 어느 것이, 과연 인간으로서 떳떳하게 살아가는 길일까? 깊어가는 가을, 나는 예? 아니오? 어디에 속할지 한번쯤 생각해 보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