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선희 경운대 교수
최선희 경운대 교수

더위도 가시고 선선한 가을을 맞이한다는 처서(處暑)가 지나면서 귀뚜라미가 풀밭에서 나오기 시작했지만 더위는 여전히 기승을 부렸다. 그런데 자연의 섭리는 놀랍다. 밤 기온이 내려가 풀잎마다 ‘흰 이슬’이 맺힌다는 백로(白露)가 찾아오며 아침저녁 시원한 바람의 손길을 느낄 수 있으니, 가을이 우리에게 성큼 다가온 것 같다. 가을하면 떠오르는 것은 단연 독서의 계절이다.

9월은 독서의 달이다. 1994년 시민들의 독서문화 정착을 위해 제정된 독서의 달을 맞아 올해 2023년 슬로건 공모 이벤트가 열렸다. 총 164편의 슬로건이 접수되어 ‘펼쳐보자 책도, 꿈도’, ‘책으로 눈 맞춤, 미래로 발맞춤’, ‘책은 한 장 한 장, 꿈은 성큼성큼’ 등 20건의 슬로건이 최종 선정되었다. 이 중 눈에 띄는 구절은 ‘책은 한 장 한 장’이다. 다산 정약용의 독서법을 생각나게 하는 문구이다.

다산의 독서방법은 세밀하게 읽으며 깊이 생각하는 정독(精讀)이다. 그는 자신의 지인과 자녀에게 정독의 방법으로 다섯 단계의 초서독서법을 설명했다. 독서 전 단계인 입지(立志), 실제 책을 읽고 그 내용을 이해하며 뜻과 의미를 찾는 해독(解讀), 읽은 내용을 능동적으로 고찰하고 자신의 뜻과 비교하여 취사선택하는 판단(判斷), 책을 읽으면서 좋은 부분이나 교훈을 받은 부분을 기록하는 초서(抄書), 읽고 생각하고 기록한 모든 것을 통합하여 자신만의 새로운 견해로 지식을 확장하고 창조하는 의식(意識)의 단계가 그것이다.

다산 정약용은 자신이 강조한 다섯 단계의 초서독서법을 몸소 실천하면서 18여 년간의 강진 유배생활 동안 500여 권의 저술을 남겼다. 그는 유배라는 처절하고 척박한 환경 속에서 복사뼈가 세 번이나 구멍이 날 정도의 과골삼천(<8E1D>骨三穿)을 겪으며 수 만권의 책을 정리하며 편집하고 자신의 의견을 덧붙였다. 18세기 조선의 한 지식인이 자신만의 독서법으로 21세기 정보화시대에 걸맞을 정도로 세상의 정보를 필요에 따라, 요구에 맞게 정리해낸 것이다. 그의 고뇌어린 왕성한 지적 의욕과 실천하는 자세가 너무나 경이롭고 존경스럽다.

다산의 초서지법(抄書之法)은 눈으로 빨리 읽는 일반 독서에 비해 엄청난 시간과 함께 노력과 인내가 필요하다.

때문에 무엇이든 바삐 진행되는 요즘시대에 맞지 않는 독서법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런데 독서, 즉 책 읽기의 목적이 무엇인가. 바로 ‘생각하기’가 아닌가. 남들보다 다른 생각, 어제보다 더 나은 생각으로 경험과 지혜를 쌓을 때 독서의 궁극적인 목적이 실현되는 것이다. 운동을 하면 몸의 근육이 단련되듯이 독서를 하면 생각의 근육이 단단해져 사고력이 강화됨을 우리는 명심해야 한다.

곧 낮과 밤의 길이가 같아지는 추분(秋分)이 다가온다. 밤의 길이가 점점 길어지면 여름이 가고 가을이 왔음을 실감할 것이다. 이 가을에, 천고(天高)에 떠다니는 뭉게구름과 같이 천천히 읽고 써보자. 하루가 멀다 하고 세상은 빨리 바뀌고 있지만 읽기와 쓰기도 그에 맞춰 따라가야 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