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선희 경운대 교수
최선희 경운대 교수

“매사 내 의견에 반응이 없는 남편 때문에 답답해서 미치겠어요.” “법륜 스님 강의를 한 번 들어보세요.”

목욕탕 찜질방에서 어떤 기혼 여성 두 분이 나눈 대화이다. 법륜 스님이 어떤 강의를 하는지 궁금해져서 유튜브 방송에서 스님의 강의를 들어보았다. 강의는 대부분 어렵고 힘든 고민을 상담하는 내용이었는데, 스님이 설파한 주요 해결방안은 “다 달라서 그래요.”였다. 그렇다. 우리는 참 많이도 상대방의 다름을 바라보지 못한 채 살아가면서 그 갈등으로 힘들어하고 있다. 상대방의 외모나 성격, 특성이 같지 않음은 당연한 사실인데 이를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은 것 같다. 나의 기준과 판단으로 평가하면서 타인의 성향이나 의견이 ‘틀리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학생들에게 ‘다르다’와 ‘틀리다’의 차이점을 물어보면, ‘다르다’의 반대말은 ‘같다’이고 ‘틀리다’의 반대말은 ‘맞다’라는 예를 들면서 두 단어의 사전적인 의미는 정확하게 구분하고 있다. 이렇게 ‘다르다’와 ‘틀리다’의 의미는 분명한데, 우리는 특히 ‘다르다’로 표현해야 하는 경우에 ‘틀리다’를 습관처럼 사용하고 있다. 그런데 잠시 곰곰이 생각해보자. 우리가 잘못 사용하고 있는 이 문제가 단순히 습관에 불과한 것일까.

혹자는 사회가 각박해져 서로 경쟁하게 되면서 자신의 의사를 좀 더 강하게 표현하기 위해 된소리와 거센소리의 어감을 사용한다고 진단한다. ‘다르다’를 사용해야 할 곳에 ‘ㅌ’의 거센소리가 들어간 ‘틀리다’를 표현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진단이 근본적인 원인은 아닌 것 같다. 우리는 외국인 노동자를 보고 “저 사람들은 우리와 피부색이 좀 틀려.”라는 표현을 자주하곤 한다. 이것은 다름에 대한 본능적인 거부감이다. “둘째 아이가 성실하고 공부 잘하는 큰 아이하고 너무 틀려서 속상해요.”라는 부모의 하소연은 ‘다름’에 대한 수용과 인정의 부족이다. 우리 모두 다르게 태어났는데 왜 ‘틀리다’고 생각 하는가.

지금은 작고한 한 야구감독이 우수한 선수의 단 하나의 단점을 고쳐 세계적인 선수로 키우고 싶다는 욕심으로 일어난 실수를 방송에서 고백한 적이 있다. 무수한 훈련과 채찍질로 자신이 지도했던 훌륭한 야구 선수의 단점을 고쳐주었더니 그가 가지고 있던 많은 장점이 사라져버렸다고 했다. 교각살우(矯角殺牛)의 우(愚)를 범한 것이다. 교각살우는 소뿔을 바로 잡으려다 소를 죽인다는 뜻으로 작은 흠이나 결점을 고치려다 도리어 일을 그르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사람마다 특성이 다름을 인정하지 못하여 우리는 얼마나 많은 잘못된 판단을 하고 있는지 반성해 볼 일이다.

우리는 모두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각자 특별하고 소중한 존재이다. 다르기 때문에 조화로울 수 있고 각양각색의 빛깔로 세상은 아름다울 수 있다. 덤으로 ‘다르기’ 때문에 협력하여 더 나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 그 뿐인가. ‘다름의 인정’은 타인을 이해하게 하는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출발점이다. 지금 바로 표현해보자. 아내와 남편에게 “당신은 ~점에서 나와 다르게 특별해요.” 친구나 자녀에게 “~생각을, ~것을 다하다니 넌 정말 나와 달라. 그리고 특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