③ 첫사랑 버리고, 죽을 때까지 아들 외면한 ‘김유신의 그림자’

김유신은 전투에 패하고 살아 돌아온 아들 원술을 죽을 때까지 자식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삽화 이건욱

몰락한 금관가야의 후손으로 신라사회에 편입한 김유신의 가문은 ‘오리지널리티(Originality)’를 갖춘 신라 귀족과는 거리가 멀다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그럼에도 열다섯 살에 수백 명의 용화향도(龍華香徒)를 이끄는 화랑이 됐고, 이후 백제·고구려와 수십 년 이어진 전투에서 신라의 다른 어떤 장수도 흉내 내지 못할 전공(戰功)을 세웠다. 뿐인가. 내란이 발생했을 땐 왕의 곁에서 듬직한 보디가드 역할을 했다.

다섯 명의 아들과 딸 넷을 뒀으니 자식복도 없지 않았다. 남성의 평균수명이 겨우 마흔 안팎이었을 7세기에 머리는 물론 수염까지 하얗게 센 일흔여덟까지 살았으니 천수(天壽)를 누렸다.

죽음 이후에는 왕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존재로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았고, 사후 1천300년의 시간이 지난 지금도 문맹의 노인들까지 ‘김유신은 신라의 명장’이란 걸 모르지 않는다.

논쟁의 여지가 없이 분명하다. 김유신은 삼국통일, 또는 삼한일통((三韓一通)을 이야기할 때 가장 첫머리에 언급되는 인물.

그렇다면 입이 아프도록 앞서 열거한 ‘화려한 이력’만이 김유신의 전부일까? 당연지사 아니다. 그럼 무엇이 그의 삶에 드리웠던 어둡고 습한 그림자였을까.

 

신분의 벽에 가로막힌 천관녀와의 슬픈 사랑은 비극적 결말로 끝나
삼국통일 이끈 ‘황산벌 전투’서는 20대 젊은 지휘관 조카 반굴 희생
전쟁터서 죽지 못한 치욕 승전으로 갚은 아들 원술마저 평생 내쳐

◆ 사랑하는 여인에게 등 돌려야했던 서러운 사연

비단 역사 속에 뚜렷한 이름을 남긴 사내만은 아닐 것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남자들 절대다수는 ‘첫사랑’의 기억을 잊지 못한다. 이는 ‘감성적 생물’로서의 인간이 가진 특질이니까.

김유신이 화랑이 된 후인 10대 후반이나 20대 초반 시기로 추정된다. 그에게도 생애 처음인 사랑이 찾아왔다. 천관(天官)이라는 여성이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녀는 기녀(妓女).

김유신의 부모가 그녀를 두 팔 벌려 환영했을 가능성이 있었을까? 없었을 것이 불을 보듯 뻔하다. 가뜩이나 신라 정통귀족이 아닌 것에 콤플렉스를 가졌을 김유신의 집안에서 술 따르고 춤추는 여자를 아들의 배필로 원하지는 않았을 터.

고려의 학자 이인로(李仁老·1152~1220)는 ‘파한집(破閑集)’에서 김유신과 천관의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에 관해 쓰고 있다. 요즘의 방식으로 풀어 쓰면 이런 내용이다.

“김유신이 젊었을 때 어머니인 만명부인은 엄한 가르침에 더해 교유(交遊)함을 잊지 말도록 했다. 만명부인이 말하기를 ‘나는 이미 늙었다. 밤낮으로 네가 성장하는 모습만을 바라보고 있다. 공을 세워 나라의 영광이 되어야 하거늘, 너는 술 파는 아이와 유희나 즐기고 있구나’라며 울었다. 이에 김유신은 다시는 천관에게 가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던 어느 하루. 만취한 김유신을 태운 말이 옛길을 따라 가다 천관의 거처에 이르고 말았다. 김유신은 한편으론 기뻤지만, 눈물을 흘리며 반갑게 맞이하는 천관을 못 본 척했다. 그곳까지 자신을 데려간 말은 목을 잘라버리고, 안장은 그곳에 버렸다. 이에 천관이 크게 절망해 노래 하나를 지어 불렀다고 한다. 경주의 천관사(天官寺)가 그때 그 집이다.”

그렇다면 실연(失戀)한 천관은 어떻게 됐을까. 요한 볼프강 폰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의 소설 속 주인공 ‘베르테르’처럼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이야기가 있고, 또 다른 속설에 의하면 “머리 깎고 여승(女僧)이 돼 다시는 환속(還俗)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처럼 김유신에게도 첫사랑에 실패하고 좌절했던 홍안의 소년 시절이 있었다. 몇 주 전 경주를 찾아 천관사지(天官寺址·천관사가 있었다고 추정되는 절터)를 돌아봤다.

슬픔으로 기록된 신라 청춘남녀의 눈물겨운 사연을 아는지 모르는지 지금은 푸른 풀만이 무심하게 바람에 나붓거리고 있었다.

 

김유신의 집터로 추정되는 경주시 교동 재매정(財買井).
김유신의 집터로 추정되는 경주시 교동 재매정(財買井).

◆ 계백과 맞선 황산벌에서 조카를 죽음으로 내몰다

삼국통일의 과정에서 가장 드라마틱하며, 후일담이 많이 떠도는 사건 중 하나가 ‘황산벌전투’다. 백제의 맹장 계백과 김유신이 맞붙었던 싸움. 여기서 만들어진 게 ‘신라 화랑의 전설’로 남은 관창과 반굴의 피비린내 나는 에피소드다.

TV드라마와 영화로 수십 차례 재탕된 것이니 황산벌전투에 관해선 긴 설명이 필요 없을 듯하다.

660년. 지금의 충남 논산 일대에서 죽음을 각오한 백제의 ‘오천 결사대’에 밀리던 신라군이 화랑 두 명의 죽음을 눈앞에서 보고는 분노했고, 이에 전의(戰意)를 불태워 백제 군대를 전멸시킨 게 바로 황산벌전투. 백제는 이 전투 이후 몰락한다.

바로 여기서 피어보지도 못한 꽃봉오리처럼 사라진 두 화랑 중 한 명이 김유신의 조카 반굴이다.

당시 국방부장관 겸 육군참모총장의 역할을 수행하던 김유신에겐 황산벌전투의 양상을 뒤집을 카드가 절실하게 필요했다.

‘젊은 지휘관의 희생’이 그가 선택한 ‘히든 카드’였다. 당시 김유신 동생 김흠순의 아들 반굴은 겨우 20대 초반, 좌장군(현재 육군참모차장 정도의 계급에 해당) 김품일의 아들 관창은 만으로 15세에 불과했다.

육군사관학교 군사학과 이상훈 교수의 논문 ‘황산벌의 위치와 전투의 재구성’은 반굴과 관창의 죽음을 감정은 배제한 채 드라이하게 서술하고 있다.

“황산벌전투 당시에는 백제군이 참호나 목책 등으로 방어시설을 구축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신라의 반굴은 ‘입진(入陣·맞서 싸우는 상대의 진영으로 들어가는 것)’하여 싸우다가 사망하였고, 관창은 말을 타고 ‘적진(敵陣·상대편 군대가 밀집한 진영)’에 뛰어 들어갔다가 포로가 된 후 되돌아왔다. 관창은 신라군 진영에 돌아온 후, 우물물을 마시고 다시 적진에 뛰어들어 싸우다 사로잡혀 참수됐다. 백제군은 관창을 참수한 후 말안장에 매어 신라군 진영으로 돌려보냈다.”

비단 신라만이 아니다. 나라의 명운을 건 전쟁에 최고 권력층의 자제가 참전하거나, 거기서 전사하는 경우는 드물지 않게 발견된다.

중국 국가주석 모택동(毛澤東)의 아들 모안영(毛岸英)은 인민지원군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했다가 죽는다. 70여 년 전 이야기다.

영국 왕위 계승 서열 5위였던 해리 윈저(Henry Windsor·39) 왕자는 10년을 영국군에서 복무했다. 그는 헬기를 조종할 줄 알며,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던 아프가니스탄에 두 차례나 다녀온 걸 자랑스럽게 여겼다고 한다.

높은 지위에는 무거운 책임이 따른다. 그 책임의 완수를 위해 조카 반굴을 죽음의 길로 보내야했던 김유신의 심정이 어떠했을지 보통의 사람들로선 짐작이 어렵다. 그러나, 그게 흔쾌한 결정이 아니었음은 누구라도 알 수 있을 듯하다.

조카 반굴의 전사는 김유신이 예순다섯에 겪은 참혹한 비극이다. 이 또한 김유신의 삶에 드리운 눅눅한 그림자가 분명하다.

 

김유신의 첫사랑 이야기가 전하는 천관사지.
김유신의 첫사랑 이야기가 전하는 천관사지.

◆ 왕에게 전투에 패한 아들을 처형하라고 청하다

앞서의 언급처럼 김유신은 일흔여덟에 사망한다. 그가 죽기 1년 전. 당나라와의 전투가 석문에서 벌어진다. 김유신의 차남 원술(元述)이 참전한다. ‘삼국사기-김유신열전’에 이 싸움이 기록돼 있다. 아래와 같은 내용이다.

“원술은 672년 석문전투에 비장(裨將)으로 참가하였다가 패배했다. 당시 원술은 나아가 죽고자했으나, 그를 보좌하던 담릉이 후일을 도모해야 한다고 만류해 결국 죽지 못했다. 원술이 살아서 돌아오자, 김유신은 국왕(문무왕)에게 ‘왕명을 욕되게 했을 뿐 아니라 가훈을 저버렸기에 목 베어야 합니다’라고 했다. 국왕의 만류로 처형당하지는 않았지만, 아버지 김유신에게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듬해 원술이 김유신의 사망 소식을 듣고 찾아오자, 이번에는 어머니가 원술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후 원술은 675년 매소성전투에서 공을 세워 상을 받았으나, 부모에게 용납되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여겨 결국 벼슬을 하지 않고 세상을 마쳤다.”

문무왕은 김유신 여동생 문명왕후(文明王后)의 아들이다. 그러니, 문무왕과 원술은 사촌지간. 아무리 큰 실수를 했더라도 사촌을 처형하기란 쉽지 않다. 게다가 그 실수는 원술이 의도한 것도 아니었다.

물론, 김유신 역시 그런 사실을 몰랐을 리 없다. 그럼에도, 자식이 듣는 앞에서 “너는 죽어 마땅하다”며, 다시는 얼굴을 마주보지 않았다는 건 21세기의 상식으론 이해가 쉽지 않다.

그러나, 세상이 아무리 바뀌어도 변하지 않는 것 중 하나가 자식을 향한 아버지의 마음이 아닐까?

대의와 명분을 위해 “내 아들의 목을 베라”고까지 말해야했던 김유신은 그날 무너지던 심정을 가까스로 남들 앞에서 숨겼을 게 분명하다. 바로 그게 그의 삶을 가장 넓고 깊게 그늘지게 했던 그림자였을 것이다.

(계속)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사진/이용선기자 photokid@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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