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의 숨결을 찾아가는 여정 전남 강진

백운동 원림

전남 강진에는 세 가지 보물이 있다고 이곳 사람들은 자랑한다. 고려청자와 영랑 김윤식, 그리고 다산 정약용이다. 강진은 다산이 18년 동안 유배생활을 했던 곳이다. 다산이 유배를 가서 처음 머무른 주막집인 사의재부터 다산초당, 백련사, 유배생활의 고달픔을 달랜 백운동 원림까지 곳곳에 그의 흔적이 남아 있다. 다산의 유배생활이 고달프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백련사의 혜장 스님과 우정을 나누고, 혜장의 제자인 초의선사에게 차에 관한 지식을 전수했다. 또한 유배지 강진에서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 등 무려 600여 권의 책을 썼다. 강진을 여행하는 것은 실상 다산의 숨결을 찾아가는 여정이기도 하다.

 

월출산 품은 백운동 원림에 반해 그림·친필 시 묶은 ‘백운첩’ 남겨
야생차로 건강 다스린 다산의 차맥 이은 ‘전설의 차인’ 이한영 종가
고손녀 이현정 차문화원 원장까지 4대째 143년 동안 명맥 이어와
학문 매진하던 다산초당서 백련사 잇는 오솔길도 옛정취 고스란히

다산초당
다산초당

◇조경예술의 백미, 백운동 원림

강진 월출산 기슭에 있는 백운동 원림을 강진 여행의 첫 번째 행선지로 잡은 것은 다산이 가장 애정을 쏟았던 곳이기 때문이다. 유배 중이던 다산은 1812년 제자들과 함께 월출산을 등반하고 백운동에서 하룻밤을 머물렀다. 백운동 원림을 보는 순간 다산은 한눈에 반해버렸다. 다산은 원림 주변의 아름다운 풍경 12곳을 정해 제자인 초의선사에게 ‘백운동도’를 그리게 하고 자신은 친필 시를 써서 한데 묶은 ‘백운첩’을 남겼다.

백운동 원림은 조선시대 원림의 극치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매력적이다. 원림의 안뜰에 시냇물을 끌어들여 마당을 굽이굽이 돌아나가게 만든 절묘한 배치부터 소나무와 대나무, 연, 매화, 국화, 난초 등이 조화를 이루며 피어 있는 모습까지 황홀하기 그지없다.

하지만 이 모든 풍경은 예고편에 불과하다. 백운동 원림 뒤편 정선대에 오르면 백운동 원림이 왜 빼어난 조경예술의 백미인지 저절로 알게 된다. 백운12경 중 제1경인 월출산 옥판봉과 함께 정원의 전체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정원 안에서는 숲으로 둘러싸여 볼 수 없던 풍경들이 옥판봉과 함께 살아나 완벽한 조화를 이룬다. 주위 풍경을 끌어들여 정원의 구성요소로 만드는 차경(借景) 기법을 확인할 수 있다.

백운동 원림을 조영한 사람은 이담로(1627~1701)다. 그는 이곳을 만든 뒤 손자 이언길에게 귀하게 여기라는 유언까지 남겼다고 한다. 다산이 이곳을 찾게 된 것도 이담로의 6대손인 이시헌을 막내제자로 받아들인 인연이 계기가 됐으니 후손들이 선조의 유지를 제대로 지킨 셈이다.

 

월출산
월출산

◇4대째 143년 동안 차 만드는 차 종갓집

다산 정약용 하면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차와 얽힌 인연이다. 월출산에는 국내 최대 야생차 군락이 있었고, 유배 시절 다산은 이곳의 야생차를 즐겨 마시며 건강을 회복했다고 한다. 다산이 즐겼던 야생차는 대중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으나 놀랍게도 명맥이 끊어지지 않았다. 조선 후기인 1878년부터 4대째 143년 동안 차를 만들고 있는 전통차의 종가가 맥을 이어온 덕분이다.

이한영(1868~1956)은 1890년대부터 이 땅 최초의 차 브랜드인 백운옥판차를 출시한 전설의 차인이다. 백운옥판차는 월출산 아래 백운동 옥판봉에서 난 야생 찻잎으로 만든 차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한영은 열 살 때인 1878년부터 스승 이흠 선생으로부터 제다법(製茶法)을 배워 차를 만들기 시작했다. 이흠은 백운동 원림을 조영한 이담로의 6대손이자 다산의 막내제자였던 이시헌에게 제다를 배웠다.

다산이 유배에서 풀려나 고향 남양주로 돌아간 뒤에는 이시헌이 매년 곡우 때 스승에게 백운옥판차를 보냈다. 이후에는 이한영이 해마다 다산의 집안에 백운옥판차를 만들어 보냈다고 한다. 이한영은 초의선사와 다산의 차맥을 이었고 지금은 이한영의 고손녀가 뒤를 잇고 있다.

◇다산이 마신 야생차를 지켜내다

이한영의 고손녀가 바로 ‘이한영 차문화원’의 이현정 원장이다. 이 원장이 월출산 아래 백운동 차막에서 그 전설의 백운옥판차를 다시 만들고 있다. 이 원장이 어렸을 때, 백운동 사람들은 다들 월출산 야생차를 따다가 차를 만들었다. 제다는 특별한 것이 아니라 일상적 풍습이었다. 시아버지(이한영)에게 차를 배운 이 원장의 할머니는 며느리(이 원장의 어머니)에게 제다법을 전수했고, 이 원장도 그것을 어깨너머로 배웠다. 하지만 월출산이 국립공원으로 지정되고 야생차 채취가 금지되면서 백운동 사람들의 차 만들기도 맥이 끊어지고 말았다. 이 원장도 자연히 차와 멀어져서 오랜 세월 도시에서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다시 차를 만들겠다는 생각으로 귀향해 월출산 아래에 자리 잡고 고조할아버지인 이한영 차의 맥을 잇고자 했다. 그런데 월출산 아래에 대규모 차밭을 조성하고 있던 한 대기업이 이한영이 만들었던 차들을 이미 상표로 등록해 놓은 상태였다. 이한영이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출시한 백운옥판차, 금릉월산차, 월산차 등 3개의 차 상표였다. 이 원장은 할아버지의 상표를 되찾기 위해 3년에 걸쳐 소송을 했고 마침내 모두를 되돌려받았다. 다산과 월출산의 소중한 차문화 유산을 지켜낸 것이다.

 

이현정 원장
이현정 원장

◇실학사상의 산실 다산초당의 고졸한 맛

다산의 실학사상의 산실이 된 곳은 다산초당이다. 다산 선생은 ‘황사영 백서사건’으로 강진에 유배되어 10년 가까운 세월을 보내게 된다.

다산 선생이 연루된 황사영 백서사건은 천주교 신자 황사영이 중국 천주교회 북경교구의 천주교 주교에게 혹독한 박해의 전말보고와 그 대책을 흰 비단에 기입한 밀서가 발각된 일을 말한다. 황사영이 정약용 선생의 (배다른) 맏형인 정약형의 사위되는 사람이니 다산은 물론 형제들에게도 불똥이 튀고 말았다. 정약형은 물론 손위 형 정약종은 참수를 당하고 둘째 형 정약전은 흑산도로 정약용은 강진으로 뿔뿔이 흩어져 유배를 가게 된다.

다산초당은 다산 선생의 담백한 성격답게 아담하면서도 고졸한 맛을 풍긴다. 제자들이 학문탐구에 매진했던 부속건물인 서암 외에는 이렇다 할 건물도 없다. 마당 앞에는 자그마한 반석이 놓여있다. ‘차를 끓이는 부뚜막’이라는 뜻의 ‘다조’라는 이름이 붙어 있는 이곳에서 자생차를 솔방울을 지펴 차를 끓였던 곳이라고 한다.

초당 서편에는 선생이 ‘정석(丁石)’이라고 글씨를 새겨놓은 ‘정석바위’가 있고 초당 뒤편 맑은 샘이 흐르는 약천이 살림살이의 전부다. 초당 옆의 연못만이 선생의 가장 큰 호사였다. 바닷가의 돌을 직접 가져와 만든 연못에는 조그만 봉을 쌓아 ‘석가산’이라고 하고 나무 홈통을 이용하여 산 속 물을 떨어지게 만들어 ‘비류폭포’라 이름지었다. 동암에서 조금 뒤편에는 ‘천일각’이 있다. 다산은 특히 형 정약전과 우애가 돈독했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흑산도로 유배 간 형을 그리는 마음을 다스리려 올라가던 누각은 쓸쓸하면서도 아름답다.

다산초당에서 백련사까지 이어지는 오솔길은 다산유적지의 정수다. 도보로 겨우 20여 분에 지나지 않는 길이지만 동백나무와 차나무가 서로 어울려 짙은 향기를 뿜어댄다.

이 길을 다산은 혜장선사를 만나러 가기 위해 오갔다. 물이 오르는 숲길로 난 오솔길에 들어서면 삿된 생각이 스르르 힘을 잃고 수풀 속으로 사라져간다.

 

함께 가볼만한 곳 ‘남미륵사’

남미륵사도 꼭 가볼 만하다. 절 입구인 일주문에서 경내로 들어가는 길에 철쭉과 서부해당화가 빚어낸 화사한 꽃 터널이 그야말로 장관을 이룬다. 봄꽃 인증샷 명소로 널리 알려져 있다. <사진>

늦은 봄에 봄꽃들이 저버렸다고 낙심하지 않아도 된다. 초여름이면 빅토리아 연꽃과 수련이 소담스럽게 핀다.

오백나한상과 삼십삼관음전, 팔각 13층석탑, 높이가 5m나 되는 거대한 부부 코끼리상 등의 이채로운 볼거리도 가득하다. /최병일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