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시대의 병적 징후들’

도널드 서순 지음
뿌리와이파리 펴냄·인문

“낡은 것은 죽어가는데 새로운 것은 아직 태어나지 않았을 때 위기는 생겨난다. 이 공백기에 다양한 병적 징후가 나타난다.”

이탈리아 사상가이자 정치가인 안토니오 그람시(1891∼1937)가 월스트리트 대공황 1년 뒤, 히틀러 집권 3년 전인 1930년에 쓴 ‘옥중수고 선집’에 나오는 구절이다.

비교유럽사 분야의 석학인 영국의 역사학자 도널드 서순(75)은 신간 ‘우리 시대의 병적 징후들’(뿌리와이파리)에서 안토니오 그람시의 이 말을 화두로 삼으며 책을 시작한다. 그람시는 1900년 초 이탈리아에서 득세했던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정부에 맞서 싸우면서 공산당을 창시했던 공산당 지도자다.

그람시가 보기에 당시 자본주의는 헤어날 길 없는 위기로 빠져들었지만, 자본주의를 사회주의로 대체할 노동계급 세력은 아직 허약할 뿐이었다. 그 위기를 비집고 들어선 파시즘과 극좌 모험주의는 그람시가 생각하는 ‘새로운 것’, 즉 자본주의의 병폐를 극복할 사회주의가 아직 생겨나지 않은 공백기에 나타나는 ‘병적 징후’였다.

‘우리 시대의 병적 징후들’은 현대 자본주의의 여러 병적 징후들을 집요하게 추적하면서 오늘날의 위기를 진단한다. ‘역사를 바탕으로 하지만 논쟁을 겨냥한 책’이라는 선언처럼 ‘우리 시대의 병적 징후들’은 ‘위기에 빠진 21세기의 해부’를 부제로 팩트를 제시한 뒤 저자의 주장을 가감 없이 전한다.

저자에게 병적 징후 중 하나인 포퓰리즘과 외국인 혐오는 주된 비판 대상이다. 이슬람 혐오를 부추기는 언론 보도 관행이나 복지국가가 쇠퇴하고 비대해진 기업의 시대에서 빈곤층은 더 빈곤해지는 세태도 구체적으로 짚었다. 저자는 기성 정당의 몰락과 유럽의 쇠퇴까지 폭넓게 다루면서 앞으로 우리는 어디에 희망을 걸어야 할지 화두를 던진다.

저자는 마키아벨리의 구절을 통해 의지의 낙관주의를 포기하지 말 것을 당부한다. “과거의 무질서를 인간의 본성 탓으로 돌리지 말고, 시대를 탓하라. 시대가 바뀌어 더 나은 정부가 세워지면, 우리 도시가 장래에 더 나은 미래를 누리리라는 희망에 합당한 근거가 생기기 때문이다.”

2022년 대선을 맞이하며 ‘정치적 야만’ 상태에 빠져 있는 대한민국에 이 책의 문제 제기는 시사하는 바가 클 것이다.

책은 제1장 낡은 것은 죽어가고, 제2장 외국인 혐오의 부상, 제3장 복지의 쇠퇴, 제4장 기성 정당의 몰락, 제5장 미국의 패권, 제6장 유럽의 서사, 제7장 유럽은 결딴나는 중?, 제8장 잃어버린 희망? 등으로 구성돼 있다.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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