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시대 말 관련 유물들.
신라시대 말 관련 유물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 조사 중인 경주 쪽샘지구 44호 돌무지덧널무덤의 주변부에서는 제사 후 버려진 것으로 보이는 토기(土器) 파편들이 다수 발견됐다.

그중 그릇 받침의 파편에서는 말의 갈퀴, 다리 관절, 발굽 등이 상세하게 표현된 말이 그려져 있었다. 말의 목부터 엉덩이까지 격자무늬가 새겨져 있어서 말이 갑옷을 입은 모양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신라시대에는 실제로 말이 있었을까?

신라의 도성이었던 월성(月城) 유적에서 말뼈가 발견됐다. 경주 쪽샘에서 가까운 황오동 100번지 유적에서도 무덤 주변에 별도의 구덩이를 파고 말뼈를 묻은 것이 확인됐고, 황남대총과 미추왕릉 지구와 같은 인근 무덤 유적에서도 말뼈들이 발견됐다.

이를 통해 토기나 벽화에 그려진 말이 상상의 동물이 아니라 살아 있는 말이 신라시대에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신라시대 갑옷을 입은 말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경주 쪽샘지구 C10호 덧널무덤에서는 말 갑옷이 바닥에 펼쳐진 채 출토됐다.

말 갑옷 주위에는 사람 갑옷도 있었고, 말 갑옷 위에는 칼과 창도 함께 발견됐다. 칼과 창의 위치로 보았을 때 말 주인은 펼쳐진 말 갑옷 위에 묻혔을 가능성이 있다. 말 투구는 껴묻거리를 묻어두는 딸린 덧널 바닥에서 따로 발견됐다. 현재까지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남아 있는 상태가 좋아서 다방면의 연구가 이뤄지고 있다.

연구 결과를 토대로 작년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에서는 C10호에서 나온 말 갑옷과 월성 해자(垓子)에서 출토된 말을 복원해 ‘말 갑옷을 입은 신라시대 말’을 복원했다.

월성 해자에서 출토된 말뼈를 토대로 크기를 복원한 결과 신라시대에 살았던 말은 어깨 높이가 120~136㎝ 정도 되는 제주마(濟州馬·천연기념물 제347호) 크기 정도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쪽샘지구 C10호 출토 말 갑옷을 이 말에게 입혀 본 결과 얇고 네모난 철판을 가죽끈으로 엮어 만든 갑옷이 복원된 말에 잘 맞춰 입혀졌다. ‘말 갑옷을 입은 신라시대 말’이 재현된 것이다.

재현된 말 투구와 갑옷은 어떤 모양이었을까?

말 투구와 말 갑옷은 두께 0.1㎝인 철판으로 제작됐다. 머리를 보호하는 말 투구는 모두 6매의 철판을 못이나 끈으로 이어 붙여서 제작했다. 말의 이마, 코, 볼을 덮어서 보호했고, 시야 확보를 위해서 눈 부분은 뚫려 있다.

말 갑옷은 목 가리개(頸甲), 가슴 가리개(胸甲), 몸통 가리개(身甲), 엉덩이 가리개(尻甲)으로 구분된다. 몸을 감싸는 갑옷은 좌·우로 분리되고, 꼬리가 있는 엉덩이 부위는 상·하로 나누어 구성됐다. 두께 0.1㎝인 철판을 두드려서 약간 곡선이 지도록 제작하고 표면은 불에 한번 구워서 오염에 강하게 만들었다.

모든 갑옷은 직사각형이나 사다리꼴로 제작된 철판에 작은 구멍을 뚫어 가죽을 연결해 만들었다. 여러 매의 철판으로 제작됐지만 가죽끈의 공간만큼 상하로 약간 유동성이 생겨서 움직일 때도 문제가 없을 것이다.

목·가슴 가리개는 말의 목 뒤쪽, 몸통 가리개는 몸의 위쪽, 엉덩이 가리개는 엉덩이 위에서 가죽끈으로 말에 고정했다. 안장이 고정되는 등 부분과 움직임이 큰 다리 부분을 제외하고는 말의 거의 전체를 무장할 수 있었다.

또 말 갑옷 표면에는 직물 흔적이 남아 있었다. 말위에 말 갑옷을 바로 고정하게 되면 갑옷 사이에 털이 끼거나, 살이 철제 갑옷에 찔릴 수도 있기 때문에 갑옷을 입히기 전 직물을 덮었을 가능성도 추론해볼 수 있다.

말 투구와 말 갑옷 재현품 무게는 약 22.6㎏이었고, 함께 묻혀있었던 말갖춤(말을 부리는데 사용되는 도구, C10호 덧널무덤에서는 재갈, 안장, 안장 밑에 까는 직물인 언치와 등자, 운주, 후걸이가 출토됐다. 이중 재갈은 말 투구 무게에 합산됨)까지 합쳤을 때는 31.7㎏이었다. 이 위에 투구와 갑옷으로 방어하고 창과 칼로 무장한 무사를 태운다면 무게는 더욱 증가할 것이다.

강진아경주문화재연구소 연구원
강진아
경주문화재연구소 연구원

대부분의 말이 몸무게에 비례해 일정 무게를 견딜 수 있는 것으로 보아 신라시대 말은 복원된 말과 같은 모습으로 신라 구석구석을 달리고 있었음을 상상해볼 수 있다.

말 갑옷은 아직 출토된 사례가 많지 않고, 신라 귀족 무덤에서 주로 출토되므로, 일정한 신분의 사람만 지닐 수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또 말은 예민한 동물인데 말 투구와 말 갑옷을 장착한다면 훈련된 말도 필요했을 것이다.

실제로 어떠한 형태로 사람을 태우고 달렸는지, 신라에 기병대가 있었는지 같은 숙제가 많이 남아있다.

죽은 자는 말이 없지만, 천오백 년 전 땅에 묻힌 유물들은 지금까지 경주에 남아서 조용히 우리에게 말을 걸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