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미영 <br>수필가
정미영
수필가

내 안의 수많은 느낌표들은 기록하지 않으면 소멸해 버린다. 꽃잎이 떨어져 날리면 어느 순간 흔적 없이 사라지는 것처럼. 그런 연유로 촉촉한 안개 속살 더듬거리듯 마음에 고인 언어들을 가끔 탐닉하기도 한다.

며칠 전, 여든아홉에 돌아가신 할머니 기일에 참석했다. 할머니께 전하고 싶은 가슴 속 활자들의 여리고 긴 여음을 쫓아가다 보면, 어떤 때는 꽃봉오리가 터질 듯이 부풀어 있던 낱말들이 내 손길을 느끼자마자 흐드러지게 문자꽃을 피운다.

편지지에 문자향을 가득 담아 제사상에 올려놓았다. 할머니가 살아생전 애지중지했던 낱말인 큰아버지 이름과 할머니 이름을 넣어 편지를 썼으니, 아마도 제사상에 오른 음식을 맛보기 전에 먼저 읽으셨으리라. 등을 구부리고 절을 하고 있으면 이따금 따스한 기운이 느껴졌다. 할머니 영혼의 자상한 손길을 내 몸이 떠올렸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할머니는 예순의 나이를 넘기면서 한글을 배우셨다. 그 해, 국군의 날이 되기 몇 달 전이었다.

“이제껏 청맹과니처럼 답답하게 글씨도 모르고 한 평생 살았다 아이가.”

더 늦기 전에 한글을 가르쳐 달라고 하셨다. 군대에서 젊은 나이에 돌아가셨던 큰아버지의 이름 석 자가 적힌 종이를 들고 충혼탑에 참배 갈 때 가져가고 싶다고 하셨다. 가끔 아들의 이름을 소리 내어 불러 보면 멀리 달아날까봐 애가 탄다고 하셨다. 일찍 남편을 여의고 아들을 의지하며 살아오셨던 할머니는 평소에 자식을 앞세웠다고 말하시며 자책하는 날이 많았다. 그런 할머니가 현충일과 국군의 날이 되면 나를 데리고 찾아간 곳이 앞산 충혼탑이었다.

자식 이름이 적힌 종이를 충혼탑 앞에 놓고 싶다는, 할머니가 유언처럼 내뱉은 말씀을 모른 척할 수 없었다. 한 평생 남은 자식들만이라도 어떻게든 지키고 싶어 열심히 사셨던 할머니가 아니던가. 글자를 모르는 것에 잔뜩 주눅이 든 할머니가 문득 안타까웠다. 나는 할머니를 꼬옥 안아드렸다.

나는 할머니의 이름과 큰아버지의 이름을 도화지에 커다랗게 적고는 냉장고 앞에 붙였다. 글자를 그림처럼 눈에 익히기 위한 방법이었다. 그런 다음 기역, 니은, 디귿, 아주 기초적인 글자부터 가르쳐 드렸다. 내 나름대로 손 카드도 만들어서 자주 보여드렸다.

드디어 국군의 날 아침이 찾아왔다. 모시적삼을 곱게 차려 입으신 할머니가 편지지에 삐뚤지만 큰아버지의 이름을 적었다. 그리고 나에게 종이를 내밀며 틀린 글씨가 있는지, 한 번 봐달라고 하셨다. 할머니의 손끝이 가볍게 떨려왔다. 나 또한 종이를 받아든 손이 떨리면서 폐부 가득 눈물이 차올랐다.

“와, 울 할매 대단하데이.”

내 입만 쳐다보고 계시던 할머니가 환하게 웃으셨다. 할머니는 충혼탑에 도착할 때까지 본인이 쓴 글자를 자꾸만 쓰다듬으셨다.

쪽빛 닮은 시월 햇살이 앞산 충혼탑 아래에 충만하게 쏟아졌다. 바람결에 실려 다니던 국가 유공자와 유족들의 일만 마디 말들이 소나무 우듬지 위에 빼곡하게 걸려 있는 듯해, 행간을 놓칠세라 열심히 읽었다. 할머니와 나는 묵념을 끝내고 계단에 나란히 앉았다. 할머니는 큰아버지의 내력을 나에게 담담히 들려주시며, 마련해 간 과일과 편지를 꺼내 놓으셨다. 그러고는 큰아버지의 이름을 부르며 보고 싶다고 눈물을 흘리셨다. 버석 마른 피부 밑에 눈물이 남아 있을 것 같지 않았지만, 신기하게도 눈물은 소맷자락을 적셨다.

생각은 말로 내뱉는 순간 허공으로 흩어진다. 손으로 부여잡고 싶어도 이미 날아가 버린 문장들은 아스라이 사라지기 일쑤다. 할머니도 살면서 체득하셨나 보다. 자식에게 보고 싶다, 그립다, 라는 말을 소리 내어 들려주는 것도 좋지만, 문자로 남겨야 울림이 더 오래 간다는 것을. 할머니 기일 때 썼던 편지를 꺼내 문자향을 흠씬 들어 마신다. 할머니에 대한 먹먹한 기억과 다정한 추억 인자들이 내포되어 있다가 내 마음자락을 물들인다. 문자향은 쉼 없는 그리움으로 변주되어 잔잔한 포말을 일렁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