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의 형태를 초등학교 교과서를 통해 처음으로 배웠다. 그 시절 나는 굉장한 우등생이었다. 난 백 점인데 넌 몇 점이야? 시험지를 앞에 두고 좌절하는 친구를 약 올리는 것은 물론이고 선생님의 질문에 가장 먼저 손을 들고 대답하는, 그야말로 얄미운 짝꿍의 전형이었다. 아마 사회 교과를 배우는 시간이었을 것이다. 선생님은 대가족과 핵가족의 개념을 설명했다. 가족은 다 함께 모여 사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현대 사회는 급속도로 핵가족화되어 간다고. 멀쩡한 구조가 이상하게 변해가고 있다며 열변을 토하던 목소리가 생생하다.

세상에는 가족 만들기를 포기하고 혼자 사는 사람도 있는데, 그건 아주 특수한 형태라는 말도 덧붙였다. 아, 혼자 사는 건 이상한 일이구나. 어린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모름지기 선생님의 말씀을 잘 들어야 한다고 배웠던 나는 백 점의 어른, 기성세대가 동그라미를 그려주는 완벽한 미래를 고대했다.

굴뚝이 있는 이층집에서 다정한 남편, 올망졸망한 아이들, 애교 많은 강아지와 함께 멋진 가족을 이룰 것이라고 다짐했다. 생을 살아내는 것도 우등생답게 거뜬히 해낼 줄만 알았다.

시간은 무럭무럭 흘러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덧 나는 선생님이 그렇게나 한심하게 생각하던 혼자 사는 여자가 되어 있었다.

난 이모랑 살아. 친구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넘어가면 될 것을 “왜?” 하고 질문해서 분위기를 무겁게 만들었던 경험이 있다. 나의 되물음에 친구는 우물쭈물하다가 몰라, 그냥 나는 그렇게 살아, 하고 말을 맺었다. 그가 내보이던 난처함에 어떤 의미가 담겼는지 알게 된 것은 훗날의 일이다.

나는 그가 사회가 인정한 ‘정상 가족’ 안에 살고 있지 않다는 생각을 기저에 깔고 그 이유를 설명하기를 바랐다. 악의를 가진 말보다 더 날카로운 무지로 친구에게 상처를 줬다. 그 죄책감은 마음 한구석에 묵직하게 남아있다.

가족의 형태는 다양하다. 이 당연한 사실을 알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나는 피를 나눈 사람들, 그러니까 조부모, 부모, 형제, 자매가 함께 사는 것만이 가족이라고 생각했다. 우리 집이 그랬고 옆집이 그랬으니까. 하지만 건너편 집의 누군가는 사돈의 팔촌과, 애인과, 햄스터와, 스마트폰이나 텔레비전과 함께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이건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다.

미국 ABC 방송에서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드라마 ‘모던 패밀리’는 다양한 가족의 형태를 보여준다. 각기 다른 성향을 지닌 삼 남매를 키우는 부부, 중소기업을 운영하는 백인 남자와 재혼한 라틴계 여자, 게이 커플과 그들이 베트남에서 입양한 아이, 뚜렷한 개성을 지닌 이들은 각자의 삶을 살아가면서도 묘하게 어우러지며 가족이라는 형태를 어렴풋이 만들어낸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 ‘어느 가족’에서 등장하는 가족은 사회 규범적으로 옳지 못한 행동으로 이루어진 공동체다. 이들은 이들만의 규칙을 가지고 있고 거기에서 안정과 위안을 얻는다. 우리가 그렇게도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족보’ 따위 없는 이들은 그 무엇보다 가족에게서 요구되는 이해와 사랑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렇듯 현대적 가족이 의미하는 것은 혈연으로 묶인 공동체가 한 지붕 아래에서 사는 것만이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홀로 살아가기를 택한 1인 가구는 어떨까. 1인 가구는 우리 사회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 이들의 비율은 꾸준히 증가하여 작년에는 무려 30.2%에 다다랐다. 크게 놀라운 일은 아니다. 내 주위에도 혼자 사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예능 프로그램 ‘나 혼자 산다’에 출현하는 연예인 역시 그렇지 않은가. 이들은 홀로 산다는 것이 얼마나 유의미한지 보여주기 위해 노력한다. 맛있는 식사를 하고 운동을 하고 친구를 만나고 집을 가꾸며 충만한 하루를 보냈다고 자부한다. 불 꺼진 집으로 들어가는 것을 외로움보다는 편안함으로 받아들이며 허심탄회하게 나 자신과 마주 앉아 사색하기도 한다. 이들의 모습에 우리는 모종의 대리 만족을 느낀다.

혼자의 삶을 선택하는 것이 부끄럽던 시대는 지났다. 홀로 라이프를 즐길 수 있는 상품은 시장에 즐비하게 나와 있다. 혼자 밥을 먹을 수 있게 테이블을 배치한 식당은 물론이고 1인 분량의 재료를 소분한 상품을 여러 곳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영화, 독서, 코인 노래방, 컬러링북, 다이어리 꾸미기 등 혼자 노는 방식도 무궁무진해서 집에서 보내는 24시간이 모자랄 정도다. 무엇보다 혼자여서 좋은 점은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나 나 자신과 강하고 다정한 관계를 형성하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미디어는 물론이고 사회 전반에서는 1인 가구에 대한 무례한 언행을 서슴지 않았다. 우리는 ‘노처녀’ 혹은 ‘노총각’이 얼마나 시대착오적인 말인지에 관해 잘 알고 있다. 마치 어떤 하자가 있기 때문에 가족 제도에 편입하지 못했으며 출산과 같은 복잡한 일은 피하는 이기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다는 식이었다.

물론 아직까지 이런 교묘한 시선은 남아 있어서 명절과 같이 친인척들이 모이는 날이면 “그래서 너는 결혼 언제 한다고?”와 같은 구시대적 질문을 들어야만 한다. 혼자 살 거라는 대찬 포부를 밝히면 별 이상한 소리를 다 듣겠다는 얼굴로 되묻는다. 사람이 어떻게 혼자 살 수가 있어?

한집에서 함께 산다는 것은 인간이 가진 주요한 특징처럼 보이지만, 이는 인간성이라기보단 동물성에 가깝다.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에서 볼 수 있는 아프리카의 얼룩말이나 우리나라의 겨울 철새는 모두 무리를 이뤄 사는 동물이다. 이들은 다양한 이익을 얻기 위해 무리를 형성한다. 포식자의 공격을 빨리 알아차리고 먹이를 쉽게 발견할 수 있으며 안정적으로 종족 번식을 할 수 있다. 가장 원초적이고 본능적인 이유, 생존을 위함이다. 인간은 단순히 먹고사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사느냐’를 끊임없이 고민하는 존재다. 이것이 여타의 동물과 다른 지점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라고 말했다. 이들은 무리 생활을 넘어 한 차원 높은 형태인 가족을 형성한다. 가족 공동체는 사회로 국가로 뻗어 나간다. 언어와 이성을 가진 존재인 인간은 끊임없이 더 나은 삶을 위해 나아간다. 토론하고 설득하고 이해하며 삶의 모양을 만들어가는 건 인간의 권리 중 하나다.

다양한 사람이 다양한 이유로 1인 가구가 되기를 선택한다. 그러나 비자발적으로 떠밀린 경우도 있다. 사별로 혼자 된 사람들이나 자녀와 함께 살지 않는 노인 계층이 그렇다. 또한 제도 속에 편입되고 싶지만 사회가 인정해주지 않는, 이를테면 동성 부부의 경우는 1인 가구로 분류될 수밖에 없다. 이들은 이성 부부와 다름없는 생활을 하지만 제도적 혜택을 받지 못하는 위치에 놓여 있다. 이성 커플이지만 결혼이라는 사회적 규약을 거부하고 동거 형태를 유지하는 이들 역시 1인 가구에 포함된다. 요즘에는 하우스 메이트를 구해 함께 사는 방식도 심심치 않게 보인다. 공간을 쉐어하는 목적으로 만나 각자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을 정도의 거리를 유지하며 경제적 절약을 추구하는 것이다. 개와 고양이와 같은 반려동물이나 반려 식물과 함께하는 삶도 있다.

인생은 정답이 있는 시험지가 아니다. 선입견에 갇혀 타인의 삶에 빗금을 긋는 과오를 저질러선 안 된다. 또한 비자발적으로 1인 가구로 편입된 이들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법과 제도는 시대적 흐름에 발맞춰 새로운 가족의 형태와 그를 뒷받침하는 역할에 관해 골몰해야 할 때다.

문은강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 ‘어느 가족’은 현대적 가족의 의미를 기존과 다른 방식으로 드러냄으로써 관객들의 주목을 받았다. /(주)티캐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