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지 않은 사람들이 “나훈아는 근대 이후 대한민국 최고의 대중예술인 중 한 명”이라는 말에 동의하고 있다. /KBS 캡처=연합뉴스
적지 않은 사람들이 “나훈아는 근대 이후 대한민국 최고의 대중예술인 중 한 명”이라는 말에 동의하고 있다. /KBS 캡처=연합뉴스

추석 전날 낮잠 늘어지게 자다가 해질 무렵에야 마스크 쓰고 집 앞 안양천을 산책했는데, 천천히 걷던 어르신들이 갑자기 경보선수마냥 빠른 걸음으로 나를 추월하시는 게 아닌가. 무슨 일일까? 다들 마스크로 입을 가리고는 “나나”, “나오나” 중얼거렸다. 뭐라는 건지 궁금했는데, 가만 들으니 그 소리는 “나훈아”였다.

어르신들은 텔레비전에서 방영해주는 나훈아 공연을 보려고 축지법까지 쓰면서 귀가를 서두른 것이었다. 아직 노래는 시작도 안 했는데, 어르신들에게 청춘을 돌려주는 나훈아의 위력에 감탄했다.

나훈아 노래 한 곡 안 들어본 사람이 있을까?

1966년 데뷔한 이후 60년 가까이 최정상 가수로 군림해온 ‘트로트의 전설’이다. 생긴 것도 꼭 시베리아 호랑이상이라서 ‘군림’이라는 말이 적확하다. 중학교 때부터 ‘잡초’, ‘건배’, ‘갈무리’ 같은 노래들을 따라 부르기도 했고, 짙은 눈썹, 부리부리한 눈, 큰 머리, 벌어진 어깨가 닮았다는 소리 꽤 들은 나 역시 팬의 한 사람으로서 막걸리 한 병과 동태전을 늘어놓고 텔레비전 앞에 앉았다. 공연을 보면서 후회했다. 나훈아 콘서트는 ‘모엣 샹동’ 같은 고급 샴페인을 마시며 봐야만 하는 것이었다. 현장 공연은 티켓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라던데, 방구석 1열에서 즐기는 이 디너쇼는 어쩌면 코로나가 준 선물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메뉴 구성에서 ‘가황(歌皇)’을 맞이할 준비가 다소 미흡했지만, 장면 하나 소리 하나 놓치지 않으려고 집중했다.

‘대한민국 어게인 나훈아’. 공연 타이틀에서부터 급이 다른 위엄이 느껴졌다. ‘대한민국’과 자기 이름을 나란히 걸고 명절 지상파 방송에 공연을 송출할 수 있는 뮤지션은 나훈아와 조용필 둘 뿐이다. 스케일이 크고 무대연출이 화려한 나훈아의 공연은 올림픽 개회식 뺨친다더니 아니나 다를까 시작부터 커다란 여객선을 몰고 등장했다. 이래저래 마음 헛헛한 추석 전야, 기차 경적소리와 함께 “코스모스 피어 있는 정든 고향역”이 울려 퍼졌다. 고향 못 간 이들의 마음이 젖어들기 시작했다. 사전 신청제로 모집된 국내외 1000명의 관객들이 스크린과 마이크를 통해 비대면 객석을 이루었다. 언택트(untact) 시대의 진풍경이었다.

아직도 근육이 탄탄하게 박힌 구릿빛 몸에 주름 없이 팽팽한 이마, 찢어진 청바지와 하얀 셔츠는 칠십이 넘은 그의 나이를 의심케 했다.

고음과 저음, 단음과 장음을 자유롭게 오가며 미세한 음 하나 하나에 감정과 서사를 싣는 특유의 가창력은 변함없었다. 아니 소리가 예전보다 더 짱짱한 느낌이었다. 노래 부르면서 춤도 추고 점프도 하고 기타도 치고 북도 때렸다. ‘고향역’, ‘물레방아 도는데’, ‘홍시’, ‘무시로’, ‘18세 순이’, ‘갈무리’, ‘영영’, ‘잡초’, ‘청춘을 돌려다오’, ‘번지 없는 주막’ 등 총 30곡을 세 시간 가까이 열창했다. 트로트를 헤비메탈, 펑크록, 댄스, 가스펠, 뮤지컬 등과 결합하여 세상 어디에도 없는 ‘나훈아’라는 장르로 바꿔냈다. 대체 뭘 드시기에 저렇게 기운이 넘쳐날까, 궁금했다. 공연 끝나고 다시 안양천에 나가보니 낮에 그 아저씨 할아버지들이 모두 같은 마음으로 팔굽혀펴기와 맨손체조를 하는 것이었다.

순간 최고 시청률 40퍼센트를 넘겼고, 포털 사이트 검색창과 뉴스란을 잠식했다. 대한민국이 들썩였다. 공연 후 여기저기서 “테스 형!”(나훈아 신곡 ‘테스형’에서 ‘소크라테스’를 칭하는 가사)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무대에서 그가 한 발언들은 정치권의 화두가 되었다. “세월에 끌려가지 말자”, “안 해 본 일들에 도전하자”, “의료진들이 우리의 영웅이다”, “국민이 힘이 있으면 나쁜 위정자들이 생길 수 없다” “대한민국 국민들은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국민들이다” 한 사람의 대중음악가가 코로나로 지친 온 국민을 위로하고, 계층과 세대, 남녀노소, 지역, 종교, 이념을 모두 뛰어넘어 사회 전체에 울림 있는 메시지를 전했다. 나훈아 말고 누가 또 그렇게 할 수 있을까? 그에게는 대체 대중을 휘어잡는 어떤 마력이 있는 걸까?

‘나훈아’라는 신화를 떠받치는 부력은 그의 철저한 자기관리다. 몸매, 체력, 가창력, 젊은 감각을 유지하기 위한 부단한 노력과 함께 그는 대중가수로서의 상품가치, 최고의 스타만이 갖는 희소성을 지키고자 구도자와 같은 삶을 살아 왔다. 재벌가로부터 내밀한 공연 요청을 받고는 “표 사서 봐라”라고 단칼에 거절했다는 일화는 ‘나훈아’의 값은 오직 그 자신 나훈아만이 매길 수 있다는 고고한 예술가적 자존, 대중을 위해서만 기꺼이 상품이 되겠다는 대중연예인으로서의 직업의식 등 그의 철학을 함축해 보여준다. 국가가 수여한 훈장을 거부하면서 “예술가는 자유로워야 한다”고 말했는데, 권력 언저리를 기웃거리는 문화예술인들이 들으면 부끄러울 것이다.

‘신비주의’로 오해 받을 만큼 사생활을 공개하지 않는 그는 스타는 밤하늘에 별로 떠 있을 때에만 존재가치가 있다는 평소 신념대로 예능 프로그램 등에 출연하는 일이 없었다. 반세기 넘도록 대중과 친밀하게 호흡해온 ‘나훈아’는 오직 노래 안에, 무대 위에만 있다. 가수는 노래로 말하는 것이 당연한데도 곡 작업을 위해 그가 두문불출할 때마다 흉측한 루머가 돌았다.

그래도 그는 대응하지 않고 침묵했다. 일부 언론이 무책임하게 뜬구름을 부풀리는 사이 소문과 전혀 무관한 지중해 해변이나 중앙아시아 고원을 걸으며 낯선 풍경들로 묵은 감각과 상상력을 씻어내는 데만 몰두했다.

문화예술계 거장이나 유력 정치인들이 스캔들로 평생 일궈온 명예와 경력을 잃는 일이 많은데, 온갖 루머와 “이제 끝났다”는 평가가 끈적끈적한 콜타르마냥 이름을 뒤덮을 때마다 나훈아는 극적으로, 자기를 불살라 다시 날아오르는 불새처럼 더 환한 빛과 뜨거운 열기를 뿜으며 돌아왔다. 그렇게 많은 루머로부터 공격 받았는데도 여전히 최정상에서 건재하다면,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기도 한다는 걸 이제는 세상이 좀 알아야 하지 않을까.

이질적이고 낯선 것들을 향해 열린 태도는 그의 음악이 ‘뽕짝’에 머무르지 않고 락, 클래식, 댄스, 가스펠, 리듬앤블루스, 힙합, 뮤지컬, 국악, 마당놀이 등과 결합한 새로운 장르로 다시 태어나게 했다. 타자성을 수용하는 열린 세계관은 단순히 음악적 시도에만 국한되는 게 아니라 그의 예술가적 삶 전체를 관통하는 인식소가 되었는데, 영남을 대표하는 가수인 그가 5·18 광주를 추모하기 위해 지난 1987년 ‘엄니’라는 곡을 썼다가 전두환 정권으로부터 탄압 받은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지연, 학연, 계층이라는 울타리를 쌓아 기득권을 유지해온 정치 이기주의, 지역 및 집단 이기주의가 한국 근대사를 지배해왔다면, 나훈아의 노래는 도시빈민, 고향을 떠나온 사람들, 이주노동자, 일용직 근로자, 샐러리맨, 농사꾼 등 시대의 ‘잡초’들 사이를 흐르면서도 부자, 권력자, 지도자, 교육자, 사상가라고 불리는 이들의 애창곡이 되었다. 음악은 만인에게 평등하다는 명제는 “홍시가 열리면 울 엄마가 생각이 난다”(‘홍시’)는 노래가 서울 세종문화회관과 곡성 오일장에 두루 퍼질 때, 빈부를 가리지 않고 사람들 입에서 흘러나오며 모성에 대한 그리움을 환기시킬 때 성립된다.

이병철 문학평론가이자 시인. 낚시와 야구 등 활동적인 스포츠도 좋아하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이병철 문학평론가이자 시인. 낚시와 야구 등 활동적인 스포츠도 좋아하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무대 연출, 장치, 소품, 컴퓨터 그래픽, 출연진의 동선까지 무대의 모든 부분에 직접 관여했을 것이다. 한 음절마다 감정과 표정을 싣는 연기력 또한 세밀하게 준비된 것이리라. 이러한 완벽주의는 ‘나훈아’라는 상품을 구매한 관객들에게 지금껏 단 한 번도 실망을 주지 않았다.

이번 공연은 ‘다시보기’ 없이 오직 단 한 번만 방영되었다. 발터 벤야민은 “예술작품이 있는 시간과 장소에서 그것이 뿜어내는 일회적인 빛”을 아우라(aura)라고 불렀는데, 현장성이 아닌, 텔레비전 화면이라는 기술복제 안에서 뿜어지는 나훈아의 빛은 아우라 그 자체였다. 변화하는 시대적 상황 속에서 변하지 않는 영원한 아름다움을 추출하는 것이 근대성이라던 보들레르의 말을 떠올리면, 나훈아는 근대 이후 대한민국 최고의 대중예술인이 틀림없다. 아우라, 가까이 있지만 멀리 있는 어떤 것의 영적인 광휘, 나훈아는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우리 곁에 있지만 저 높이, 저 멀리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