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밖에 나가지 않는 생활이 일상이 되었다. 최근 서울·경기 지역에 코로나19 확진자가 급증하자 정부는 강화된 방역 조치로 ‘사회적 거리두기’를 2.5단계로 격상했다. 수도권의 음식점은 오후 9시까지 운영되고 프랜차이즈형 카페나 베이커리는 포장만이 가능하다. 헬스장이나 각종 실내체육시설도 운영이 중단된 상태다. 개강 시즌이 무색하게 대학가는 고요하고 밤낮으로 북적이던 번화가 역시 텅 비었다. 이렇듯 모두가 힘을 모아 바이러스 확산을 막기 위해 노력하는 중이다. 쉬운 일은 아니다. 자타공인 집순이인 나 역시 참을 수 없는 답답함을 느끼고 있으니. 분리수거를 하러 나서는 잠깐의 순간도 방역 마스크를 써야 한다. 카페에서 글을 쓰는 작업을 해왔는데 이젠 어려운 상황이 됐다. 단골 술집에 옹기종기 모여 맥주잔을 맞대던 여름밤도 다 지나갔다. 내가 이렇게 바깥 공기를 좋아했던가. 이전엔 미처 몰랐던 스스로에 대해 알아가는 요즘이다.

상상해본다. 내게 시간을 멈추는 능력이 생긴다면 어떨까. 누구도 눈치 채지 못하게 시간을 정지한 뒤, 나 혼자만이 움직일 수 있다면 가장 먼저 무엇을 할까.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진 이를 구할 수 있다. 얄미운 상사의 이마에 꿀밤을 날려줄 수도 있겠다. 이런 과대망상이 현실이 된대도 마냥 즐겁지만은 않다. 아무도 없는 깜깜한 거리를 걸으며 지상 마지막 생존자가 된 것만 같은 기분에 잠겨본 적 있다. 사람들과 부대끼는 것은 피곤하지만, 그들이 모두 사라진 세상은 끔찍하게 느껴진다. 멈춰버린 시간 속에 혼자 남겨진다는 건 자유보다 고독에 가깝다.

나는 인류를 위협하는 바이러스와 맞서 싸우는 천재 과학자도, 뛰어난 운동 신경으로 좀비를 무찌르는 전사도 아니다. 시간을 멈추는 초능력자는 더더욱 아니다. 요즘 내가 하는 일이라곤 하루에도 몇 번이나 울리는 재난문자를 확인하며 전전긍긍하는 것뿐이다. 확진자의 동선을 파악하며 혀를 쯧쯧 차다가 익숙한 지명에 화들짝 놀란다. 내가 거기를 다녀왔던가. 과거의 발자국을 헤아리며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역시 ‘집콕’이 가장 마음 편하다. 간단한 모임 약속을 잡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당장 필요한 식료품도 배달을 이용한다. 몸이 뻐근하면 유튜브를 켜고 스트레칭을 따라 한다.

이런 와중에도 눈앞의 일은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원고 마감일은 째깍째깍 다가온다. 일주일에 두 번 화상 회의 도구인 줌(zoom)으로 학생들과의 수업을 진행해야 한다. 모니터 너머의 아이들은 풀죽은 목소리로 말한다. “선생님, 코로나 대체 언제 끝나요?” 그러게 말이다. 안타까운 마음을 누르며 몇 시간이고 화면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속이 울렁대고 머리가 지끈거린다. 힘들다고 투덜대는 것도 잠시, 일이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라는 가상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린다. 이런 상황일수록 더욱 열심히 해야 한다며 자신을 채근하게 된다.

‘K-직장인’이란 이런 우리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어떤 상황에서도 누구보다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 긍정적인 뜻이 아니다. 국가적 위기나 자연재해, 심지어 사람을 물어뜯는 좀비가 출몰할지라도 한국의 직장인은 꾸역꾸역 회사를 나갈 것이라는 자조적인 의미가 담겨 있다. 실제로 홍수 때문에 물이 허리까지 찬 상황에서 물살을 가르고 출근하는 이들의 영상은 전설처럼 내려와 인터넷을 떠돈다. 양복에 서류가방을 들고 일터를 향해 용맹하게 나아가는 모습에 감탄 아닌 감탄을 내뱉게 된다. 우리는 그렇게 배웠다. ‘아파도 학교에서 아파라. 몸담은 직장에 뼈를 묻어라.’ 이것은 비대면 시대에도 유효한 듯하다. 뼈를 묻어야 하는 장소만 바뀌었을 뿐이다. ‘아파도 화상 강의는 참여하고 아파라. 컴퓨터 전자파를 받으며 한 줌의 재가 되어라.’

완전히 지쳤다. 휴식의 필요성을 간절하게 느끼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렇다. 나는 쉬는 것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는 어른으로 자라버렸다. 생전 처음 접하게 된 ‘거리 두기’의 시간이 무한정으로 길어지면서 더더욱 일과 휴식을 분리하지 못하고 있다. 안락한 소파와 침대가 이젠 더 이상 쉼의 공간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지인 중 한명은 주말의 휴식 시간을 철저하게 계획한다고 했다. 국가공무원으로 일하는 그는 자신만의 ‘휴식 루틴’을 가지고 있다. 10시까지 늦잠 자기. 2시간 운동하기. 6시까지 레고 조립하기. 30분 동안 목욕하기. 일기 쓰고 잠자리에 들기. 이렇게 자신이 생각하는 휴식을 충실하게 이행해야만 제대로 쉬었다는 느낌이 난다는 것이다. 쉬는 것마저 계획적이라니. 나도 모르게 박수가 나왔다. “당신이야말로 진정한 ‘K-공무원’입니다.” 그는 머쓱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사람마다 휴식의 방식은 다르니까요.” 문득 궁금해졌다. 다들 이 시간을 어떻게 보내고 있을까?

집에 있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모바일 게임이나 온라인 동영상의 유저가 급증했다. 대표적인 OTT 서비스인 넷플릭스의 사용자는 끊임없이 증가하며 역대 최대치를 갱신하고 있다. 나 역시 넷플릭스, 왓챠, 유튜브 프리미엄을 사용하는 사람으로 프로그램 개발자에게 굉장히 감사해하고 있다. 동영상 서비스 없이 어떻게 시간을 보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이것이 휴식으로 느껴지진 않는다. 현재의 시간을 빠르게 흘려보낸다는 느낌이 더 강하기 때문이다. 정신을 집중하여 마음의 평화를 찾기 위해 명상 앱을 켰다. 편안한 음악이 흐르고 몇 분 지나지도 않았는데 불안해졌다. “당신은 무한한 우주를 홀로 떠다니고 있습니다.” 명상 안내자의 목소리에 나는 곧바로 앱을 종료했다. 집에서도 혼자 있는데 우주에서도 혼자라니. 그건 너무나 가혹하지 않은가.

사실상 완벽한 고립은 불가능하다. 세계와 연결되었다는 감각이 있어야 마음이 놓인다. 정치·사회면은 어떤 사건이 장식하고 있는지, 연예계에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대한민국이 제대로 굴러가고 있는지 확인해야 안심이 된다. 인터넷 기사와 댓글, 각종 소식과 정보는 침대 위에서도 끊임없이 쏟아진다. 포털 사이트에 올라온 메인 기사부터 시작해서 트위터, 페이스북, 네이트판까지 정독해야 직성이 풀린다. 모니터 너머의 이야기에 파묻혀 정작 내가 직접 눈으로 보고 피부로 경험한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게 된다.

이와 함께 우울감을 호소하는 ‘코로나 블루’에 빠진 이들도 생겨났다. 코로나 사태의 장기화로 나타난 현상이다. 일상생활의 제약이 커진 것은 물론이거니와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호도, 가짜 뉴스 등으로 심각한 피로감을 호소하는 것이다. 좋은 일이라곤 하나도 없는 것만 같아 화가 나고 분노가 치밀어 오르기도 한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해보자. 슬픔이나 분노 또한 삶의 원동력일 수 있다. 가장 위험한 것은 아무것도 진단하지 않고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는 태도다. 아무리 노력해도 더 나아질 것이 없다는 냉소와 허무의 늪에 빠지는 순간, 우리는 무기력이라는 무시무시한 괴물에게 잡아먹히게 된다.

집에서 홀로 시간을 보내며 좋은 점을 꼽아보기로 했다. 순전히 나의 정신 건강을 위함이다. 먼저 강아지와 보낼 수 있는 물리적인 시간이 확보되었다. 나의 반려견 보리는 종일 헥헥대며 내 곁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친구들과의 연락이 설레어졌다. ‘어느 날 아침, 내게 초능력이 생기면 어떨까’와 같이 쓸데없는 망상을 하는 시간도 늘어났다. 좋아하는 가수의 공연을 보거나 미술관에서 하루를 보내던 당연하게 존재했던 일상이 얼마나 소중했던가에 대해 깨닫게 되었다. 코로나가 끝난 이후에는 무엇을 할까 계획하는 것도 소소한 재미다.

물론 이것은 자기 위안에 불과하다. 유치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지금이야말로 극단적인 자기 암시가 필요한 때가 아닐까. 우리는 어떤 메시아적 전언을 기다린다. 시련은 모두 끝났다. 이제 우린 안전하다. 하늘에서 빛이 쏟아지고 허공에서 목소리가 들려오면 좋겠다. 물론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 ‘일시 정지’된 시간을 ‘빨리 감기’하여 낙관적인 미래로 훌쩍 건너뛰고 싶다. 이 역시 상상에서만 존재할 뿐이다. 현실의 상황을 응시하고 현재의 시간을 버텨야 한다. 많은 이들이 예측하듯 세상은 이전과 같을 순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코 무너지지 않는다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더 나은 내일이 올 거라고. 무엇보다 우리는 함께, 하루하루를 견디고 있다고.

 

 

문은강

‘춤추는 고복희와 원더랜드’로 주목받은 소설가. 201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작가로 등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