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6년에 출판된 소설 ‘지킬박사와 하이드씨’의 초판.

요즘 우리 주위의 공기는 ‘확실성’으로 가득 차 있다. 무른 땅을 피하고 단단한 땅만 딛으며 살고자 하는 욕망들이 어디에나 떠다니고 있다. 물론 어느 시대건 그 시대의 주류들이 갖고 있는 것들을 확고한 형태로 영영 지속시키고 싶어하는 욕망이야 계속 반복되어온 것이었으니, 새삼스러울 일도 아니다. 게다가 우리의 삶이나 소통, 미래와 자본 등 인간이 불확실한 상황이 주는 공포에서 벗어나 단단한 돌만을 딛고 가기를 바라는 마음이 자연스러운 것임을 모를 일도 아니다. 또한, 사회 전반에서 불필요한 ‘신화’가 사라지고, 서로의 확고한 입장을 바탕으로 좀 더 실용적인 논의가 전개될 수 있는 것은 ‘개방 사회’를 맞이하는 자연스러운 사회적 변화일지도 모르겠다.

생각해보면,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계의 근간은 바로 인간이 가진 자기 존재에 대한 확실성에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닌가. 마치 서구 근대 철학의 시작점인 르네 데카르트가 방법적 회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를 통해 도달했던 ‘코기토(cogito)’, 즉 여기 시공간 속에 우리가 실재로 존재함을 확인하고 나서야 비로소 인간이 자기 의식과 행위의 주체가 될 수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인간이 그렇게 자기 생각과 언어의 주인이 되고 난 뒤, 쌓아올린 사상과 과학은 인간 사회 속에서 어둠 속에 싸여 있던 불합리와 불확실을 어둠 바깥으로 내모는 계몽의 도구가 되어왔다. 전통적으로 인간이 다다를 수 없는 미답의 영역은 그렇게 인간이 추구해온 ‘확실성’을 통해 하나씩 하나씩 탈신비의 대상으로 바뀌어 간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일까. 꿈이든, 환상이든, 모든 신비한 영역이 과학의 공리들과 설명하는 언어로 가득 차 버렸다고 해서, 그것이 우리 마음속에서 완전히 사라질 수 있을까. 이런 시대에도 분명 어떤 불안들은 스멀스멀 살갗 아래로부터 올라오곤 하지 않는가. 어쩌면 우리의 주변이 ‘확실성’에 대한 바람들로 가득 차 버렸기 때문에야말로 더욱 ‘확실하지 않은 것들’에 대한 공포 내지는 불안 혹은 애착이 더 커지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소설 ‘지킬박사와 하이드씨’의 저자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소설 ‘지킬박사와 하이드씨’의 저자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1850~ 1894)이 쓴 소설 ‘지킬박사와 하이드씨’에 담겨 있는 공포는 이런 것이다. 이 작품은 궁극적으로는 인간에게 내재된 선악 양면성을 발견하여 궁극적으로는 윤리성에 대한 재확인으로 귀결되고 있지만, 사실 이 작품의 가장 큰 주제는 사회속에서 인정받는 박사인 지킬 속에 존재하는 무언가 불확실한 존재, ‘나’를 두고 주인됨을 경쟁하는 숨겨진 ‘하이드’에 대한 공포이다.

이 ‘하이드’는 인간이 자신의 정신과 신체를 온전하고 확고하게 점유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의식을 통해 우리에게 가장 근대적인 공포를 일으킨다. 인간은 자신의 몸이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이지 않는다거나, 자신의 기억에 없는 행동을 했다는 흔적을 발견하게 되면, 자기 속에 무언가 다른 존재의 개입을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다는 가장 끔찍한 공포에 시달리게 된다. 그러한 공포는 시대가 흐른다고 해도 그리 달라지지 않는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인간의 상상이 시작되는 것은 바로 이 공포에서부터이다. 내가 잠을 자는 사이에 내 안의 하이드씨가 출현하여 사회적인 금기를 깨는 행동을 하고, 나아가 그 존재가 ‘나’를 두고 주도권을 경쟁한다. 이런 상상만으로도 우리의 마음속에는 공포와 매혹이 공존하는 독특한 ‘하이드’라는 공간이 만들어지게 되는 것이다. 자아분열, 몽유병, 기억상실, 도플갱어, 정신착란 등 인간이 자기 존재의 유일성과 확실성을 의심하는 이야기가 여전히 나오고 있는 것은 그것이 우리에게 여전히 깊은 공포를 건드려 겁에 질리게 하면서도 실눈을 뜨고 계속해서 보도록 하는 매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마음속에 남아 있는 여전한 상상의 여백인 것이다.

/홍익대 교수 송민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