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순옥<br>수필가
윤순옥
수필가

한 끼 식사를 해결할 간단한 방법을 찾는다. 아무리 찾아봐도 배달음식만한 게 없다. 습관적으로 메뉴를 훑어보고 결국 짜장면을 주문한다. 짜장면은 아버지가 보고 싶을 때면 문득 생각나는 음식이기도 하다.

버스를 타고 싶던 때가 있었다. 하루 왕복 두 번, 집 앞 신작로를 지나는 버스에는 안내양이 있었다. 한손을 밖으로 내밀어 차 옆구리를 탁탁 치고 ‘오라이’ 하면 찰떡같이 알아듣고 출발했다. 차를 타고 읍내에 다녀온 친구들이 먹은 자랑, 본 자랑을 늘어놓으면 부러움에 언제가 될지 모르는 그날을 기다리며 마음만 실어 보낼 뿐이었다.

초등학교 4학년 여름이었다. 어머니는 사촌언니에게 물려받은 옷 보자기를 풀어 그중 작은 옷을 골라주며 입기를 재촉했다. 갑자기 왜 옷을 갈아입어라하는 것인지 영문도 모르고 시키는 대로 했더니, 외출 준비를 마친 아버지를 따라 나서라는 것이었다. 머뭇거리다 아버지 뒤를 따랐다. 우리는 내리막을 지나 정류장에서 멈췄다. 정류장 앞에는 구멍가게가 있었고 그곳에서 담배를 팔았는데 그것 때문인가 했다. 그런데 그것도 아니었다. 아버지와 있는 시간이 불편해 멈춰 있기 보다는 차라리 걷는 게 나을 듯싶었다. 침묵의 시간이 한참 동안 흐르고 마을 어귀에 버스가 나타났다. 버스가 도착하자 아버지는 타라는 손짓을 했다. 얼떨결에 버스에 올랐다.

아버지가 어렵고 무서웠다. 평소 말씀이 없으셨던 분이 예의에 어긋난 행동에는 불호령이 떨어졌다. 야단을 맞지 않으려고 행동을 조심하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존재가 느껴져 신경을 써야했다. 아버지 머문 자리도 돌아서 다닐 정도였다. 궁금했지만 도저히 어딜 가는지 여쭈어 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동네를 몇 개나 지났을까 색다른 풍경이 나타났다. 친구들이 말했던 곳으로 짐작되는 말 탄 장군 동상이 보였다. 동상을 중심으로 여러 갈래 길이 나 있었다. 상주읍내를 처음 본 나는 사방으로 난 길도, 우리 동네 집들과 다른 건물도, 오고가는 사람도 신기할 뿐이었다. 버스가 데려다 놓은 곳은 내가 본 가장 큰 세상이었다.

그토록 원하던 버스를 타고 읍내에 갔는데도 즐겁지가 않았다. 그즈음 가난한 집 아이들을 식모로 보낸다는 소문이 돌았고 실제로 친구 언니가 도시에 가서 식모살이를 한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차를 타고 읍내까지 온 것을 보면 분명 큰일이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아 조마조마하고 무서웠다.

아버지 뒤에 바짝 붙었다. 아버지는 시장에 들러 몇 가지 물건을 샀다. 그리고 붉은 천이 바람에 너풀거리는 붉은 집으로 들어갔다. 벽지도 붉고 등도 붉은 집에서는 맛있는 냄새가 났다. 아버지는 짜장면 한 그릇을 시켰다. ‘짜장면’ 이라는 말에 불안함도 잠시 잊고 친구들이 먹었다는 음식을 상상했다. 음식은 금방 나왔다. 까만 것이 번들거렸다. 까만 음식이라더니 직접 보고도 믿기지 않았다. 그 사이 아버지는 짜장면을 비벼서 내 앞으로 밀면서 말씀하셨다.

“오늘 네 생일이지 많이 먹어라.”

아, 그랬구나, 그랬었구나! 나는 그것도 모르고 어디로 나를 보내려는 것 아닌가하고 얼마나 마음 졸였는지 모른다. 그날은 잊고 있던 내 생일이었다. 산골에서 생일은 덤덤하게 보내기 일쑤였고 운이 좋아 삶은 달걀이라도 먹는 날은 최고였다. 열한 살 생일은 특별했다. 처음으로 버스를 탔고 처음으로 세상에서 제일 맛있다는 짜장면을 먹은 날이었다.

짜장면 한 그릇을 비우던 날, 마주 앉은 아버지를 보지 못했다. 때를 훌쩍 넘긴 시각이라 아버지 배도 쪼그라들었을 텐데, 배고픔도 잊고 자식만 먹이던 가난한 아버지를 헤아릴 수 없었다. 어른이라고 배고픔이 없었을까. 부모가 되어보지 않고는 알 수 없었던 심정을 조금씩 알아가는 중이다. 배고팠을 아버지를 떠올리면 지금도 알끈한 것이 마음이 편치 않다.

짜장면 한 그릇은 두고두고 펼쳐 볼 선물 보따리요, 아버지를 향한 내 눈물 보따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