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방사 보광명전과 삼층석탑을 둘러싼 참나무 숲. 고방사는 김천시 농소면 벽봉로 1444의 143에 위치해 있다.

문득, 새벽 기도가 하고 싶은 날이다. 한 시간 반을 달려 산사에 도착했을 때는 어느새 아침이 되어 있었다. 이른 아침의 산사는 싱그러웠다. 비가 올 듯 흐린 하늘, 바람에 적당히 몸을 흔드는 7월의 숲에 싸인 주차장, 단정한 어깨를 자랑하는 일주문, 그 안으로 있는 듯 없는 듯 이어지는 길, 모든 게 사랑스러운 아침이다.

일주문을 들어서는 마음도 여느 때보다 정갈하다. 다듬어지지 않은 길이 계곡을 따라 누워 있고, 바람 소리에 깨어나는 나뭇잎들의 은밀한 아침 인사가 높은 곳에서 들려온다. 세월이 낸 흔적 사이로 쭉쭉 뻗은 참나무들이 무리지어 살아가는 곳, 떨어진 나뭇잎과 채 익지 않은 도토리를 보니 굴참나무다. 내 영혼도 함께 깨어나는 아침 산길, 그곳에는 절제와 균형, 고요하면서도 부산한 은혜로움으로 가득하다.

이내 하늘을 가리던 숲이 환해지며 고방사가 보인다. 팽나무 한 그루가 시선을 끌며 분위기는 달라진다. 아주 작은 절인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크다. 천왕문을 지나 높은 계단 위로 보이는 삼층석탑과 대광보전, 긴 계단을 오르는 발걸음도 모두 기도가 된다. 지은 지 오래 되지 않은 전각들은 여느 절과 다름없이 평범하고, 절에 비해 큰 삼층 석탑이 시선을 모으고 있다.

고방사는 직지사의 말사이다. 경내의 현판 기문에는 418년 아도가 창건했다고 적혀 있지만 일설에는 신라 법흥왕 13년(526년)에 창건했다고도 한다. 이후 조선 중기까지의 연혁은 전해지지 않지만 45동에 이르는 대규모 사찰이었다고 전한다. 임진왜란 때 불에 탄 것을 여러 차례 중창하였지만 숙종 45년(1719년) 수천이 절을 새로 옮겨 지었다. 보광전만 현재의 위치로 옮기고 나머지 전각은 빈대가 많아서 모두 태웠다고 한다. 보물 제 1854호 고방사 아미타여래 설법도는 직지사 성보 박물관에 보관 중이다.

보광명전 법당문이 활짝 열려 있다. 비가 올지도 모를 날씨에 불자를 맞는 스님의 세심한 정성이 보인다. 누군가 새벽이슬을 털며 들어섰을지도 모를 법당, 신발을 벗고 문턱을 넘는 무심한 행동에도 아침공기가 떨며 일어선다. 목조 아미타삼존불의 평온한 시선을 의식하며 백팔 배를 시작한다. 호흡은 여느 날보다 더 차분하다.

손녀가 태어나던 날, 한 편의 잘 빚어진 서정시처럼 아이의 인생이 펼쳐지길 얼마나 숨죽이며 기도했던가. 인생은 고행이라 하지만 아름답고 호기심 가득한 것들로 채워져 있다. 가끔은 전쟁 치르듯 긴장과 아픔으로 숨죽일 때도 있지만 삶은 분명 축복이다.

작은 소리에 반응하고 시선이 옮겨갈 때는 또 얼마나 경이로웠던가. 어느 별에서 저토록 고귀한 생명이 흘러와 나와 깊은 인연을 맺게 되었을까? 아이가 순수한 눈빛을 보내올 때마다 나는 수많은 다짐들로 화답하곤 했다. 너무 높지도 허술하지도 않은,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 주겠노라고. 하지만 인생은 끊임없이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한다.

생후 10개월을 넘긴 손녀는 발육이 늦은 편이라고 했다. 또래 아이들에 비해 언어와 대근육 발달이 늦다며 젊은 의사는 두어 달 지켜보다 정밀검사 받아보기를 권유했다. 그토록 총명해 보이던 아이를 방점처럼 찍혀 따라 다니며 괴롭히기 시작했다. 틈만 나면 억지로 아이를 세워보기도 하고 걱정스러운 눈빛 속에 스며드는 불안감을 잠재울 수가 없었다.

힘들었던 며칠이 그대로 아침 기도에 실린다. 절을 거듭할수록 법당문을 드나드는 아침 공기는 더욱 상쾌해지고, 점점 보이지 않던 내가 보인다. 아이의 든든한 울타리는 경제력도 지성적인 잣대도 아니다. 아이를 믿고 지켜볼 수 있는 무한한 긍정의 힘이다. 그런데 나는 불안한 마음을 얹어 사랑이라 둘러대며 허우적거렸으니, 저토록 순수한 영혼이 모를 리 없다. 벌써부터 또래와 비교 당할 수밖에 없는 세상을 향해 아이는 어찌 첫발을 용감하게 뗄 수 있으랴.

손녀의 양육을 책임져야 할 상황이 부담스러웠던 것일까. 가만히 나를 들여다 본다. 체력적인 한계와 주변인들의 만류, 미련을 버리기 힘든 것들과의 단절, 그 속에서 나는 중심을 잡지 못했던 것 같다. 이 아침, 훌륭한 양육자로서의 내적 성장이 절실함을 깨닫는다. 확신 없이 심은 꽃씨가 어찌 건강한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울 수 있으랴.

조낭희 수필가
조낭희 수필가

스스로를 믿고 사랑하지 못하면 어떠한 성공과 행복도 무의미하다. 지나치게 남을 의식하지 않고 언제나 밝고 꿋꿋한 아이로 성장시키고 싶다. 타인을 향한 시선에도 이해와 사랑이 실릴 수 있다면 무엇을 더 바라랴. 어둡고 불안했던 마음들이 아침 기도에 쓸려 나가고 내 안에는 젊고 의욕적인 기쁨들로 채워진다. 그것은 새로운 목표가 되어 가슴이 설렌다.

법당 밖으로 펼쳐진 참나무 숲이 유난히 아름답다. 자기다움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나무들은 바람이 불 때마다 한 몸이 되어 움직인다. 참나무는 결코 송백(松柏)의 절개를 꿈꾸거나 탐하지 않는다. 크기와 모양이 다른 나무들이 제각각 어울려 숲은 풍요롭다.

한 때의 어둠을 토해내고 아침이 잉태한 숲의 언어들이 나를 격려하며 배웅한다. 내려올 때 바라본 숲은 훨씬 깊고 거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