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재휘 논설위원
안재휘 논설위원

“군주가 고집이 센 성격으로 간언은 듣지 않고 승부에 집착하여 제멋대로 자신이 좋아하는 일만 하면 그 나라는 망할 것이다.”

중국 전국시대 말기 법치주의를 주창한 한비와 그 일파의 논저인 한비자(韓非子)에 나오는 소위 ‘망국 십계명’ 한 구절이다. 민주주의를 거론할 여지라곤 없었을 그 시기에 승부에만 집착하는 지도자의 소아병적인 리더십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정확하게 설파한 대목이 신비롭다.

문재인 대통령이 또다시 ‘협치(協治)’를 강조했다. 문 대통령은 지난 16일 국회 본회의장에서 열린 제21대 국회 개원식 개원 축하 연설에서 “협치도 손바닥이 서로 마주쳐야 가능하다”며 “누구를 탓할 것도 없이 저를 포함한 우리 모두의 공동 책임이라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문 대통령의 발언은 그른 게 없다. ‘저를 포함한’이라는 수식어는 반성의 기미까지 읽힌다.

그런데 두렵다. 그동안 청와대에 여야 지도부를 불러 대화를 할 적에도 문 대통령은 ‘협치’를 기대할 수준의 ‘공자 말씀’을 많이 했다. 그러나 돌아서면 곧바로 집권당인 더불어민주당의 정치행태가 강공 일변도로 흐르곤 하던 기억을 우리는 갖고 있다. 겉 다르고 속 다른 소리장도(笑裏藏刀)의 정치술수가 구사되는 건 아닌지 심히 의심쩍은 형편이다.

문 대통령은 “적대의 정치를 청산하고 반드시 새로운 협치의 시대를 열어야 한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구구절절 옳은 말씀이다. 내우외환의 협곡에 처박히고 있는 이 나라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가야 할 길이기도 하다. 그러나 현실은 정반대다. 그 황당한 모순의 중심에 ‘승자독식(勝者獨食)’에 찌든 집권당이 있다.

‘협치’는 무조건 승자의 아량과 양보에서 출발한다. ‘다수’의 힘으로 ‘소수’를 굴종하게 만들 요량이라면 ‘협치’의 문은 결코 열리지 않는다. 지난 4·15총선 이후 더불어민주당은 ‘국민 통합’이나 ‘협치’의 미덕과는 멀어도 너무 먼 정치행태를 보여왔다. 전통적으로 야당 몫인 국회 법사위원장을 군사 작전하듯이 점령했고, 급기야는 18개 상임위를 모두 독점하고 있다. 그래놓고 매사를 야당의 비협조가 원인이라고 욱대기는 내로남불의 남 탓만 읊어대고 있다.

집권세력의 의도적 오독(誤讀) 감염은 중증이다. ‘정치보복’이라고 써 놓고 ‘적폐청산’이라고 읽는다. ‘검찰 장악’이라고 써놓고 ‘검찰개혁’이라고 읽는다. ‘언론 장악’이라고 써놓고 ‘언론 개혁’이라고 부르댄다.

대통령이 국회 연설에서 ‘협치’를 강조했다. “공동 책임”이라고도 했다. 이런데도 민주당이 국회 법사위원장 자리를 토해내지 않는다면 이건 확실한 ’레임덕 현상’이다. 백선엽-박원순 사망을 기점으로 확산하고 있는 이념 갈등을 해소할 방책도 없이 지금처럼 지지자 결집만을 줄기차게 추구한다면 ‘협치’ 타령은 썩은 솜사탕이다. 그런 노래는 한낱 신기루요 공갈빵이다. ‘승부에 집착하여 제멋대로 자신이 좋아하는 일만 하는’ 권력자들의 표리부동에 국운이 날로 위태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