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근식포항침례교회담임목사
조근식포항침례교회담임목사

섬나라 일본이 앞선 근대화로 저들이 가진 힘으로 야욕을 불태우며 1904년 2월 8일 러일전쟁 도발과 동시에 대한제국 침략의 발판을 굳히고 대한제국 황성을 공격해 당시 황궁이었던 경운궁을 점령했습니다. 이어 1904년 2월 23일에는 대한제국에 대한 주도권을 확보하기 위해 대한제국 영토를 일본의 군사기지로 제공하는 한일의정서를 강압적으로 체결하고 서울을 비롯한 전국의 군사 요충지를 강제 점령했습니다.

그 이후 1910년 한일합병조약이 체결되고 1945년 8월 15일 광복의 기쁨을 찾기까지 약 36년간의 치욕적인 시대를 우리의 역사 속에 간직하고 있지 않습니까? 오늘날 당시 한일합병이 무효라고 일본 역사학자들과 우리 학자들이 외치고 있지 않습니까?

해방에 이어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어 자리를 채 잡기도 전에 1950년 6월 25일 새벽을 틈타 북쪽 김일성의 야욕으로 남침함으로 민족의 한을 남긴 전쟁이 이 땅에 발발했습니다.

6·25 전쟁은 남북한 모두에게 엄청난 희생과 재산을 함께 잃어버린 비운의 전쟁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엄청난 국난에 자유수호를 위해 전투 병력을 파견한 나라 가운데 3천 명 이상 나라가 프랑스(3천421명), 뉴질랜드(3천795명), 네덜란드(5천322명), 필리핀(7천420명), 오스트레일리아(8천407명), 터키(1만4천936명), 영국(5만6천명), 미국(1백78만9천명) 등이었습니다. 그 외에도 태국, 그리스, 남아프리카공화국, 벨기에, 룩셈부르크, 콜롬비아, 에티오피아, 노르웨이 등 많은 나라 군인들이 전사했거나 부상당하였습니다.

6·25 전쟁으로 희생된 전사 및 사망자가 17만8천569명. 부상 5만5천22명. 실종 2만8천611명. 포로 1만4천158명, 우리나라 통계는 전사자 13만7천899명, 부상자 45만742명으로 기록에 남아 있습니다.

얼마나 많은 희생의 값을 치러야 했습니까?

그 아픔과 상처의 자리에 하나님의 회복과 치유의 역사로 오늘의 조국 대한민국이 있다고 확신합니다. 그 아픔을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할 6월에 이제 조국 대한민국의 근대사에 얼룩진 역사 현장을 기억하며 다시 이런 아픔과 슬픔을 후세대에 물러주지 않기 위해 새로운 도전과 결단으로 새 역사를 다시 쓰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