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사회적 거리 두기가 강조 되는 나날입니다. 사회적 거리 두기를 잘 실천하고 있다는 것은 달리 말하면 그만큼 가족 간의 물리적 거리는 가까워졌음을 의미합니다. 기숙사 생활을 하던 아들이 코로나를 핑계로 귀가했습니다. 스무 살 넘으면 집 떠나야 한다, 는 생각을 지닌 터라 갑작스런 아들과의 동거가 적잖이 신경 쓰입니다. 일찍이 객지 생활을 한 아이였기에 애틋한 감정이 앞서지만, 며칠 새 불편한 상황들이 그 감정을 섞어버리는 걸로 보아 제 모성에도 이끼 같은 스트레스가 끼나 봅니다.

여기까지야 엄마로서 감당할 저만의 상황이니 괜찮은데, 살짝 한 발 더 나가는 게 문제입니다. 십 년 전이나 지금이나 한결같은, 부모 입장에서의 당연한 말씀이 뒤따르는 것 말입니다. 일찍 일어나라, 운동해라, 감성을 잃지 마라, 그리고 계획해라……. 네, 하고 건성으로 돌아오는 대답 또한 십 년째 변함이 없습니다. 지리멸렬하기만 한 훈화와 답하기 속에서 두 사람의 생각은 다릅니다. 엄마는 누르고 눌러 겨우 한 번 말한 것 같은데, 아들은 오늘도 어제와 같은 레퍼토리를 들어야 하나 하는 부담감을 맛봅니다. 가까이 있는 한, 엄마는 하나마나한 ‘좋은 말’을 하지 않을 수 없고, 자식은 들으나마나한 ‘잔소리’를 듣지 않을 수 없습니다. 부모는 경험한 대로의 삶의 나침반을 제시한다지만, 자식 입장에서는 바라던 바가 아닌 모정의 덫에 걸리는 격입니다. 거리 두기는 ‘사회적’으로만 필요한 게 아니라 ‘가정적’으로도 요청된다고나 할까요.

적당한 거리가 확보 되어야 현명한 소통에 이를 수 있다는 건 만고의 진리입니다. 시공간적으로 너무 가까운 거리는 느긋하고 성숙한 관계를 해치는 훼방꾼이 될 수도 있습니다. 가족애든 우정이든 또는 사회 관계망이든 다 해당 되는 말씀 같습니다. 일단 너무 가까우면 상대의 초심에 괜한 의문을 갖게 됩니다. 흔히, 믿었던 상대에게서 실망감을 맛보면 우리는 ‘초심을 잃었다.’라고 표현합니다. 곰곰 생각하면 그 누구도 초심을 잃은 적 없는데 말입니다. 초심은 한 가지가 아닐뿐더러 거기 그대로 있는데다 드러나지도 않습니다. 이런저런 초심들이 사람 안에 살지만 우리는 상대에게서 보고 싶은 한두 가지만 봅니다. 좁은 거리감에서 오는 기대감이 그런 상황을 만드는 것이지요. 초심을 잃은 건 상대가 변해서 그런 게 아닙니다. 믿음이나 환상을 가진 내 마음이 변한 것입니다. 자신의 환상을 상대에게 투사해 초심을 잃었다고 단정해 버리는 것이지요. 내 환상이 걷힌 자리가, 잃어버렸다고 생각한 상대의 초심이 되는 겁니다. 기대라는 가지에 달아버린 나의 환상이 언제나 문제인 것이지요. 이 모든 게 너무 가까워서 생기는 심리적 착시라는 생각이 듭니다.

누구나 타고난 단점과 성장 과정의 결핍, 그로 인한 묻어버리고 싶은 콤플렉스를 지니고 삽니다. 약점 많은 사람끼리 잘 지내려면 거리가 필요합니다. 저 테라스에 피어난 제라늄 화분만큼의 거리면 딱 좋겠습니다. 적당한 거리가 유지된 만큼 꽃끼리 뭉치는 법도 없고, 남의 화분을 침범할 이유도 없습니다. 안심 거리를 확보한 꽃들은 거리낄 것 없이 화사한 빛깔을 피워 냅니다. 화분끼리 다닥다닥 붙어 있다면 저마다의 꽃잎들이 저토록 창 아래서 생기를 뿜지는 못하겠지요. 다닥다닥 좁혀진 거리라면 작은 바람에도 꽃잎끼리 부딪혀 물러지고 질척거리게 될 테니까요.

찢어지기 쉽고 떨어지기 쉬운 꽃잎 같은 관계의 속성에 주목한다면 적당히 무심해야 오래 간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바랄 게 없으면 야속할 일도 없습니다. 물이나 주고 바람정도나 통하게 두면 꽃피울 것을, 매일 물을 주고 매만지다 보면 꽃 피우기는커녕 새싹 돋는 것도 만나기 힘들겠지요. 매일 보면 찡그릴 수 있지만 가끔 만나면 웃음 짓게 됩니다. 괜히 고슴도치 이론이 있는 게 아니겠지요. 좋다고 비비대면 서로 돋은 가시에 상처만 입을 뿐입니다. 근원적인 친밀감이 형성되었다면 적당히 멀 때, 오래 가고 피로도도 덜합니다. 가까워지려고 허둥대는 마음이 항상 상대에게로 순정하게 전달되지만은 않습니다. 적당히 떨어져야 가볍고 산뜻한 꽃을 피울 수 있습니다.

김살로메소설가
김살로메소설가

핀 꽃도, 예쁘다고 꽃병 앞에서 코를 박는다면 꽃병도 깨지고 내 코에도 파편이 박힙니다. 코를 들이미는 대신 맞춤한 거리에서 덤덤히 바라보면 그 꽃은 오래 갑니다. 자주 본다고 깊어지지도, 멀리 있다고 얕아지지도 않는 게 관계입니다. 요란한 결속일수록 풀어지고 흩어지기 쉽습니다. 관계의 밀도는 지근한 거리가 아니라 상호 신뢰에 바탕을 두는 것이니까요.

마인드맵처럼 번져가는 반성문을 쓰다 보니 당장 아들에게 필요한 건 ‘모성의 거리’라는 걸 알겠습니다. 그러고 보니 거리 두기의 지향점은 결국 자신을 향한 것이네요. 타자로부터의 거리 두기는 스스로부터의 거리 두기에로 종결 되는 것 같습니다. 자기 내면과 떨어지는 연습을 통해 자기 객관화를 도모하는 길 말이에요. 가족애든, 인류애든 조금 떨어지는 과정을 통해 좀 더 성숙된 사랑을 연습하고 실천할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