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 70주년 치열했던 경북지역 전투현장 (3) 칠곡다부동 전투
UN군 지원으로 대구지역 방어
북 3개 사단에 치명적 패배 안겨

다부동 전투
북한의 수상 김일성과 부수상 박헌영은 소련과 중국의 지원을 받아 전쟁을 준비하고, 스탈린과 마오쩌둥의 동의를 얻어 6·25전쟁을 시작했다.

북한은 ‘애치슨선언’을 발표한 미국이 전쟁에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고 봤다. 북한의 예측은 빗나갔다. 미국은 전쟁 발발 직후 참전을 선언했다. 미국은 자국을 중심으로 한 16개 나라 연합군(유엔군)을 조직해 한국으로 보냈다. 이로써 6·25전쟁은 국제전으로 확산됐다.

UN군의 지원으로 풍전등화에 처한 대한민국이 공산주의에 무릎을 꿇지 않았다. 전쟁의 잿더미 속에서 대한민국은 2020년 기준 북한과 달리 경제(세계 11위), 문화(한류 열풍), 스포츠 대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UN군의 참전을 이끈 사람이 트루먼 미국 대통령이었다. 미군 파병을 거절하던 트루먼을 설득한 사람이 빌리 그레엄 목사임이 6·25전쟁 70주년을 앞두고 알려졌다.

광복 이후 미군정 시대였다. 당시 김일성의 지령을 받은 박헌영은 매일 서울 시청 광장에서 미군 철수를 주장하는 대중집회를 열었다.

미군정은 비밀리에 대한민국 국민들을 대상으로 여론조사를 진행됐다. 결과는 공산주의 50%, 자유민주주의 30%, 사회주의 20%로 나타났다. 이 결과는 트루먼 미국 대통령에게 보고됐다. 1년 후 미군이 철수했다.

1950년 1월 12일 애치슨 미국 국무장관은 극동에서의 미국 방어선은 한반도를 배제, 대륙으로부터 후퇴를 뜻하는 이른바 ‘애치슨라인’을 공표했다. 당시 북한이 남침할 경우 미국이 개입하지 않으리라는 것이 국내외의 정세였다.

그해 6월 25일 일요일 새벽 4시 북한은 남침을 강행했다.

트루먼은 토요일(현지시각) 별장에서 북한이 남침했다는 보고를 받고 “예상된 일”이라며 방치했다.

당시 그는 ‘작은 전쟁을 막지 못하면 큰 전쟁으로 비화된다’는 책을 읽고 있었다. 빌리 그레엄 목사의 회고록에 따르면 한국교회의 요청으로 트루먼에게 전문을 보냈다. 미군을 파병해 한국을 구할 것을 제안했다.

빌리 그레엄 목사는 “한국에는 50만 명의 기독교인들이 있다”고 간곡히 요청했다.

트루먼은 휴전 뒤 기자회견자리에서 기자들로부터 “중요하지 않다고 포기했던 나라에 그 토록 막대한 전비와 인원을 투입해가며 전쟁 수행을 결심한 이유가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고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하늘의 뜻’이라는 의미였다.

6월 25일 오후 2시(뉴욕 시간) UN안전보장이사회는 상임이사국의 일원인 소련 대표가 불참한 가운데 북한의 남침을 ‘평화 파괴’ 행위임과 동시에 ‘침략행위’로 규정했다. 다행히 소련이 불참하지 않아 이 같은 결의안이 통과될 수 있었다.

UN군 지원에 힘입어 대구를 방어한 곳이 칠곡다부동 전투이다.

□ 칠곡다부동 전투

6·25 전쟁 중 국군 제1사단이 맡은 ‘328고지(석적면)~유학산(해발 839m)~741고지(가산면 금화리)~902고지(가산, 산성)’를 연결하는 약 20㎞의 방어선은 최후의 보루였다. 국군 제1사단은 사단 좌측에서 ‘왜관-낙정리’(의성군 단밀면, 다부 북방 43㎞)를 방어하고 있던 미국 제25사단이 8월 1일 경남 마산으로 이동하게 됨에 따라 이 지역을 맡아 제11·12·15연대 등 3개 연대로 북한군의 남하를 막는 지연전을 펼쳐 왔다.

8월 12일에 주저항선인 낙동강 방어선으로의 철수 명령에 따라 이날 오후 8시 다부동 일대의 주저항선(‘Y선’)으로 철수를 시작했다. 사령부를 동명 초등학교에 두고 예하 3개 연대에 대해 방어 지대를 부여했다.

국군 제1사단은 이들 지형의 이점을 활용해 다부동 일대에 설정된 주저항선에서 대구를 공략하려는 북한군 3개 사단을 상대로 낙동강 방어 작전 중 치열한 혈전을 벌였다.

다부동 일원에서는 대구를 놓고 피아간에 유학산 전투, 328고지 전투, 837고지전투, 674고지 전투, 볼링장 전투, 가산산성 전투 등 낙동강 방어선 상 뿐 아니라 6·25 전쟁에서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이 가운데서 837고지는 대구 사수의 최고 요충지였고, 유학산은 아홉 번, 328고지는 무려 열다섯 번이나 고지의 주인이 바뀔 정도로 피아간에 물러설 수 없는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다. 국군 제1사단은 방어선을 지키기 위해 미 8군 사령부에 병력 증원을 요청했고, 미국 8군 사령부에서는 미국 제27연대(마이켈리스 연대)를 신속히 지원하고, 이어서 미 제23연대를 추가 배치했으며, 육군본부도 1개 연대를 추가 배속시켰다.

이렇게 병력 증강을 지원받은 국군 제1사단은 낙동강 방어선 구축 이래 북한군의 ‘8월 공세’와 ‘9월 공세’를 방어하고 나아가 이를 격파함으로써 위기에 빠진 전황을 타개했다.

이후 국군 제1사단은 영천 신녕 서쪽 지역으로 이동하여 팔공산~가산 전투를 수행한 후 유엔군의 총반격 작전에 가담했다.

특히 다부동 전투는 55일간이나 계속됐으며, 북한군 2만 4천여 명과 국군 1만여 명이 죽거나 다치는 인명 피해를 냈다.

그 결과 당시 투입된 북한군 3개 사단에 치명적인 패배를 안겨 줘 전세를 역전시키는 계기가 됐고, 6·25 전쟁사에서 다부동 일원에서 벌어진 전투는 국군의 위대한 전투로 기록되고 있다.

/김락현기자 kimrh@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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