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성사 포대화상과 높다란 계단 위에 있는 대웅전. 도성사는 대구 동구 도평로 77길 261에 위치해 있다.

예정되지 않는 만남과 계획 없는 여행이 좋을 때가 있다. 휴일 아침 날씨나 컨디션에 따라 불현듯 마음이 통하는 친구와 만날 수 있다는 건 참으로 감사한 일이다. 일 년에 고작 서너 번 정도의 만남이지만 그 시간들은 값지고 소중한 추억으로 이어진다.

“네가 좋아할 만한 절을 발견했어. 천년고찰이 아니기에 재미있는 전설이나 볼거리는 없지만 꽤 느낌이 괜찮은 절이야. 너도 가보면 분명 좋아할 거야.”

깊은 산속에 숨어 있는 작은 절을 떠올리며 나는 온갖 상상으로 행복해진다. 한 달째 허리통증을 호소하면서도 여전히 나를 배려하는 친구의 마음씀이 더 고맙다. 성격이나 전공은 다르지만 정서적인 교감 하나로 언제나 든든한 친구, 그녀는 나를 믿고 아픈 몸을 움직였고 나는 그녀를 의지하며 운전대를 잡았다.

천연기념물 제 1호인 도동 측백나무숲을 조금 지나자 좌측 편으로 절의 안내판이 보인다. 들꽃처럼 소박한 눈을 뜨고 길가를 지키는 생소한 이름이다. 이 길을 몇 번이나 오가며 관심없이 지나쳤던 나의 무심함이 부끄럽다. 낯설고 조심스럽던 길은 다리지라는 작은 연못 하나로 갑자기 익숙하고 친근해진다. 어릴 적 추억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아주 작고 정겨운 못이다.

못 둑에 갈대가 필 무렵, 도시에서 공부를 하던 삼촌이 양동이 가득 우렁이를 잡아주던 오랜 기억 하나가 월척이 되어 낚인다. 못물을 빠져나간 진흙 속에서 팔딱거리던 미꾸라지들의 몸부림, 눈부시게 뽀얗던 삼촌의 발목, 산골짜기를 울리던 때묻지 않은 웃음들을 떠올리며 나는 오랫동안 전하지 못했던 안부를 전한다.

그 많은 꿈들과 따스했던 눈빛들, 다시는 돌아가지 못할 기억들로 내 영혼은 촉촉해져 온다. 추억은 변함없이 삶에 물기를 더해주는데 육신은 늙어가며 옛날을 그리워하고 있다. 친구의 심장에도 월든의 호수같은 무욕의 자연 하나 박혀 있나 보다. “좋재 좋재”만 되풀이 하던 친구도 생각에 잠겨 말이 없다.

자동차는 한껏 무거워진 몸으로 가파른 시멘트 길을 오른다. 각박한 삶처럼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을 만큼 위협적인 오르막이다. 주변을 살필 겨를이 없다. 비탈길을 오르고 나니 한적한 솔밭 내리막길이 펼쳐지고 구릿빛으로 그을린 중년 남자가 산악용 자전거를 타고 맞은편에서 올라온다. 건강한 열정을 토해내는 숲길을 들어서기가 참으로 미안해진다.

길은 혈류처럼 천혜의 자연 속으로 이어지고, 절은 숨바꼭질을 하듯 쉽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솔숲 그늘 길은 이따금씩 이글거리는 태양에 목덜미를 잡히기도 하면서 도성사를 찾아 나아간다. 밤꽃 향기가 스멀스멀 숲으로 숨어들 무렵 내리막길 끝에 제법 너른 하늘이 열리며 절이 있음을 알린다. 담장은 낮아서 넉넉하고 그 뒤로 나무로 만든 사립문이 도성사의 불이문을 대신한다.

몸집 자그마한 여인 홀로 하늘거리는 원피스를 입고 맨발로 걸어 나온다. 하늘과 숲과 하나가 되어 힐링 중인 그녀에게서 나무냄새가 날 것 같다. 정자에서 자전거와 쉬고 있던 사람들이 우리가 도착하자 헬멧을 쓰고 폐달을 밟으며 다시 숲으로 향한다. 숲은 말없이 그들을 받아주고 그들은 힘들게 숲을 통과하여 또 도시로 향할 것이다.

결코 적막하지 않은 일련의 풍경들을 높은 곳에서 대웅전이 내려다보고 있다. 긴 계단을 오르며 친구는 조심스럽게 할미꽃씨를 따서 주머니에 넣고 나는 우리가 올라온 길을 내려다본다. “요즘은 채송화, 할미꽃, 봉숭아 같은 꽃들이 좋아지더라.” 친구의 말을 흘려들으며 나는 또 다시 숲을 빠져 나오는 자전거들의 반짝거림을 응시한다. 사람들은 정자 앞에 멈춰 헬멧을 벗고 약속이나 한 듯 대웅전을 바라본다.

조낭희 수필가
조낭희 수필가

평화가 흐르는 풍경, 무탈을 기원하는 대웅전, 어느 새 법당에 들어가 아픈 몸으로 삼배를 하는 친구, 이 모든 광경들이 보석처럼 눈부시다. 나도 뒤늦게 백팔 배를 시작한다. 친구의 건강이 빨리 회복될 수 있기를, 배낭을 메고 이 솔숲을 다시 걸어와 나란히 백팔 배할 수 있기를, 나의 기도는 소박하고 평범하지만 간절해진다.

절을 하는 동안 삽질소리가 쉬지 않고 들린다. 서걱서걱 염불소리만큼 경건하게 만든다. 60여 년의 역사를 가진 절에는 주지 스님의 살아있는 기도가 끊이지 않을 것만 같다. 백우당 쪽에서 젊은 처사님과 울력 중인 스님의 야심찬 정성을 위해 가만히 두 손을 모은 후, 친구를 찾아 나선다.

칠성각에 부처님처럼 앉아 있는 친구의 얼굴에도 생기가 돈다. 우리에게 더 이상 무엇이 필요하랴. 소소한 즐거움을 나눌 수 있는 친구가 곁에 있고, 내 힘으로 열지 못하는 문 앞에 설 때까지 감성 충만한 풀꽃처럼 살 수 있다면 좋겠다. 지금 이 순간의 생각들이 일상으로 이어지기를 바라며 절을 내려온다.

추억이 우리를 겸허하게 성장시키듯 도성사도 아름답고 건강한 염원들로 채워질 것이다. 오층석탑은 교신이라도 하듯 저 멀리 팔공산 레이더 기지를 응시하고, 스님은 또 손수레를 끌고 유월의 햇살 속을 걸어가신다. 가까이서 팔공댐은 저토록 태평스레 졸고 있는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