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목원 나들이를 갔습니다. 변덕 앓는 제 맘과 달리 꽃 피고 지는 일은 어쩜 저리 한결 같은지요. 숲 천지 꽃 잔치, 신록이 한창입니다. 오월 동산에 취한 것도 그만인데, 운 좋게 샤스타데이지까지 만났습니다. 전망 좋은 언덕, 한울타리 가득 흰 꽃을 피워 올립니다.

데이지 종류는 제가 좋아하는 꽃입니다. 경계가 분명한 꽃이지요. 뒤집어 보지 않는 한 드러나지 않는 꽃받침이며, 꽃 필 자리보다 한참 밑에 자리 잡은 이파리, 가시 없는 줄기마저 곧게 뻗어 꽃송이와 부수적인 것들이 뒤섞이지 않습니다. 심지 곧고 깔끔하며 소박한 꽃이지요.

데이지와 달리, 꽃송이와 잎사귀가 뒤섞여 피는 꽃들이 화려하게 보일 수는 있으나 너저분한 인상을 주는 면이 있어요. 하지만 데이지는 꽃송이는 송이요, 줄기는 줄기요, 이파리는 이파리대로 각각 제 자리를 지켜 핍니다. 튤립이 그러하고 양귀비꽃도 비슷하긴 해요. 깔끔하기로만 따진다면 그 둘이 나을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두 꽃은 어쩐지 고고한 느낌이 있어 부담스러운 면도 없지 않아요. 그에 비해 데이지꽃은 적당히 소박하고 알맞게 단정한 모습이지요. 산뜻하지만 가볍지 않고 소담스럽지만 격조를 잃지 않는 꽃입니다.

환대의 시늉도 없고 포장의 허례도 없는 꽃. 향기 아래 가시를 박지도 않고, 미소 뒤로 우울을 숨기지도 않습니다. 꽃송이보다 큰 꽃받침으로 꽃 본연을 갉아먹지도 않고, 넘치는 향기로 꽃잎을 미혹에 빠뜨리지도 않습니다. 다만 담박하게 피어 있을 뿐입니다. ‘나 이런 꽃이니 알아주시오.’ 하지도 않습니다. ‘나 그냥 이렇게 피었소.’ 하고 그대로 있을 뿐입니다. 그럼에도 어딘지 모르게 진중한 위엄이나 날렵한 멋을 품고 있다고나 할까요.

사람도 마찬 가지예요. 데이지꽃만 보면 떠오르는 친구가 있어요. 학창 시절, 의기소침하면서도 질척댔던 저에 비해 담백한데다 넘치지 않았던 그 친구를 참 좋아했었지요. 심지가 곧으니 포장할 필요가 없고, 사심이 없으니 과장할 이유도 없는 그런 성정의 친구였어요. 얼핏 보면 그녀는 평범하다 못해 존재감이 없는 것처럼 보였어요.

단체 미팅을 했을 때였지요. 누가 봐도 괜찮은 남학생이 있었어요. 대부분의 친구들이 그 남학생에게 관심을 보였을 때 친구는 그저 덤덤하기만 했어요. 성격 상 호들갑을 떨거나 적극성을 비칠 친구가 아니었어요. 그것이 도리어 그 남자를 도발했나 봐요. 친구에게 꽂힌 남학생은 사흘이 멀다 하고 친구를 찾아 왔어요. 물론 친구는 꿈쩍도 하지 않았지요. 지나치다싶을 만큼의 무덤덤함이 오히려 남학생을 울릴 만큼의 매혹이 되었다는 것을 그 친구는 알지 못했어요. 소식조차 모르는 그 친구를 지금 만난다 해도 그 점은 변하지 않았을 거예요. 천진스럽지만 직접적이고, 단순하지만 단호했던 그 면을 제가 좋아했던 거지요. 아마 남학생도 저와 같은 마음이었지 않나 싶어요. 복잡할수록 핵심에서 멀어지잖아요. 단순함과 깔끔함은 같은 집안 아니겠어요.

글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데이지꽃 같은 이미지의 글을 선호합니다. 그러려면 덜어냄의 미학이 우선 되어야 해요. 그런 의미에서 이 칼럼도 너무 기네요. 글의 본질은 주제에 있어요. 전하고 싶은 게 선명하면 말에 꼬임이 없습니다. 알면서도 글이 잘 풀리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제 맘이 허욕으로 들떠 있을 때입니다. 쓰레기로 가득 찬 손끝에 힘이 들어차니 글이 무거워집니다. 덕지덕지 붙이고 켜켜이 쌓는 순간 형체는 모호해지고 끝내 글의 경계가 무너집니다. 마감에 내몰릴 때면 정도는 더 심합니다. 며칠 지난 뒤 보면 버릴 것투성이입니다. 퇴고의 명약은 시간이라는 걸 느끼는 부끄러운 순간이지요.

김살로메소설가
김살로메
소설가

써지지 않는 글 때문에 머리가 무겁고 심장이 무거운 날이면 데이지꽃을 떠올립니다. 에너지를 소진하는 잡념부터 없앱니다. 쓰잘머리 없는 곁가지 치기에 집중합니다. 더하기는 쉬워도 빼기는 왜 이리 어려운지요. 그럴수록 한 줌 덜고 두 말씀 닫는 연습을 하는 거지요.

오후로 가는 수목원, 한밭으로 깔린 데이지 언덕에 오월 바람이 나부낍니다. 여백 깃든 저 꽃처럼 소담스레 피어날 글꽃들을 그려봅니다. 꽃송이와 주변부의 조화를 생각하며, 줄기는 곧게 이파리는 조금 멀리 플롯을 짜봅니다. 꽃잎 아래, 보일락 말락 배경으로 들일 꽃받침도 잊지 않지요. 덤덤한 듯 정갈한 글 꽃 한 송이, 꽃대를 올리는 상상만으로도 미소 짓는 아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