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화진영남대 객원교수·전 경북지방경찰청장
박화진
영남대 객원교수·전 경북지방경찰청장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열흘 넘게 피는 꽃은 없다. ‘권불십년(權不十年)’. 10년을 넘기는 권력은 없다. 아무리 화려한 꽃이라도 10일을 넘기지 못하고 나는 새를 떨어뜨린다는 권세 역시 10년 넘게 지속될 수 없다는 말이다.

주역의 이치를 들지 않더라도 세상이 변한다는 것은 상식적인 일로 받아들인다. 아침 산책길에 철 보내는 꽃들이 이곳저곳 떨어져 있다. 몇몇은 즈려밟힌 자국들이 선명하다.

화려한 날은 가고 사람의 발자국이 주홍글씨처럼 찍혀 있음에 울먹이는 것 같아 산책 내내 떨어진 꽃들이 눈에 밟힌다. 사람의 발에 밟히고 눈길에 외면당한 꽃의 말년이 안타깝기까지 하다.

모진 긴 겨울 남몰래 버티고 새봄에 잠시 폼 좀 잡은 날이 겨우 10일이라니 야속한 마음이 들었을 듯하다. 사람들은 꽃이 겪은 지난겨울 인고의 시간을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화려하게 핀 모습을 즐길 뿐이다. 다가와 향을 맡는다.

배경삼아 사진을 찍는다. 고운 자태에 감탄사를 연발한다. 언제까지나 곁에 있을 것 같이 그 가벼운 친근감을 맘껏 즐겼다. 짧은 몇 날이 가고 계절을 재촉하는 비바람에 뚝뚝 떨어져 길바닥에 나뒹굴게 된다. 언제 그랬냐는듯 사람들의 눈길 한 번 제대로 받지 못하는 신세로 전락한다. 사람 마음이 다 그런거려니 받아들이기엔 아쉬움과 회한이 밀려온다.

하지만 이 또한 세상 이치다. 정승집 개가 죽은 경우와 정승이 죽은 경우가 다른 것이 세태다. 명심보감에 ‘주식형제 천개유(酒食兄弟 千個有), 급난지붕 일개무(急難之朋 一個無)’란 말이 있다, 술 마시고 밥 먹을 땐 형동생 하는 사람이 천 명이 넘는데 어려운 일을 당할 때 같이할 친구는 한 명도 없다는 말이다.

잘 나갈 때는 너도 나도 친분을 과시하다가 정작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땐 사람이 썰물처럼 다 밀려가고 없다는 말이다. 세상인심으로 맞는 말인 것 같은데 왠지 서글픈 생각이 든다. 평소 너의 행실도 문제가 있어 그런 것 아니냐고 되받는다면 더욱 할 말을 잃고 비참함만 느끼게 될 뿐이다.

인생살이도 꽃처럼 한 때 만개할 때가 있다. 나의 화려한 날은 언제까지나 지속될 것 같은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 하지만 대부분 사람들이 만개한 꽃이 시들거나 떨어지듯 어느 시점엔 퇴락의 때를 맞이한다. 물론 때가 되어 물러남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지혜는 자신의 몫이다. 자연스러워야 할 퇴장의 시간이 백세시대를 맞아 때 이른 퇴장그늘로 짙게 드리우고 있다.

정신적·육체적 활동 능력이 아직은 청장년같은 사람들이 퇴장의 긴 시간들에 시달리고 있다. 근교 산에 평일 등산객으로 출몰(?)한다. 출근시간이 훨씬 지난 시간에 산책로가 붐빈다. 평일 골프장 내장객으로 퇴장의 시간을 보내는 사람은 제법 호사를 누리는 부류에 속한다. 아직 자녀들 교육과 독립을 위해 이곳저곳 2진으로 뛰어들어 남은 구간을 뛰는 처지가 되면 말년 삶이 신산함을 넘어 처량해진다.

이제 나의 아름다움과 향기를 맡기 위해 몰려들던 상춘객은 어디에도 없다. 시들고 떨어진 꽃이지만 한 번 더 바라봐 줬으면 하는 바람뿐이다.

한 때는 당신들이 좋아하고 열광했던 꽃이었으니 한 번 더 눈길을 줬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