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볕이 따습습니다. 겨우내 갇혀 있던 화분들을 베란다 창턱에다 내놓았었지요. 다육이들 작은 잎새마다 새순이 돋고, 빨갛거나 노란 기왕의 잎들도 선명한 때깔을 자랑합니다. 물리적 거리 두기 캠페인으로 갑갑하지만, 앙증맞은 잎들을 살피노라면 그나마 작은 위안이 됩니다. 몇몇 화분을 더 들여야지 하는 핑계를 앞세워 봄 마중을 나섭니다.

봄을 보채는 온갖 물상들이 점멸등처럼 깜박입니다. 차창으로 스며드는 먼빛의 아른거림을 시작으로, 아파트 꾸밈 벽 바위틈을 뚫고 핀 영산홍의 춤사위며, 물기 서린 바닥으로 내려앉는 벚꽃들의 분분함이 차례로 어룽거립니다. 볕이 다사로울수록 쉬엄쉬엄 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요.

길섶, 사과 바구니를 갈무리하는 할머니가 보입니다. 넓디넓은 과수원을 배경 삼아 앉은 품새가 쩨쩨하거나 손이 작아 보일성싶지는 않습니다. 잠깐 실리적인 계산속이 제 머리를 스칩니다. 공판장이나 마트보다는 싸고 맛난 과일을 ‘득템’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생각보다 비쌌지만 흥정도 에누리도 없이 한 바구니를 샀습니다. 할머니가 사과를 꾸리는 동안 저는 과수원에 내려앉은 별사탕 같은 봄까치꽃을 앵글에 담았지요.

다시 길을 나섭니다. 벚꽃 터널이 시작되지만 시국이 시국이니만큼 상춘객은 눈에 띄게 줄었습니다. ‘드라이브 스루’(drive-through, drive-thru) 안내 현수막이 꽃길 따라 나부낍니다. 패스트푸드 가게에서나 필요했던 이 첨단의 방식이 행락에도 적용될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었지요.

아시다시피 드라이브 스루는 주차하지 않고 상품을 구매할 수 있는 서비스를 말합니다. 우리말로 다듬자면 ‘승차 구매’쯤이 될까요. 장소를 가리키는 의미라면 ‘승차 구매점’도 될 수 있겠네요. 순화한 표현도 순우리말이 아니니 굳이 바꿔 부를 필요까지는 없겠지요. 일찌감치 미국에서 첫선을 보였다지만 그때는 지금처럼 비대면 방식으로 서로를 연결한 것은 아니었겠지요.

단순하고 스피디한 것을 마다않는 저는 코로나가 오기 전부터 드라이브 스루에 호의적이었답니다. 햄버거 한 세트를 사기 위해 매번 매장 안을 서성이지 않아도 된다니 이보다 매혹적인 편의가 어디 있겠습니까. 인간미가 좀 없어 보이긴 하지만, 서비스 주체와 손님 간에 신뢰만 있다면 큰 문제가 될 것은 없겠지요. 실제 드라이브 스루로 구매한 햄버거가 잘못 나온 적이 있었는데, 직원의 친절한 전화 응대에 감동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이런 작은 경험도 드라이브 스루에 긍정적인 제 마음에 일조를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경상도식 발음 영향인지 ‘드라이버’라고 틀리게 인쇄된 현수막 글씨마저 인간적입니다. 드라이브 스루는 원조 격인 미국보다 이제 우리에게 익숙한 것처럼 보입니다. 코로나 사태를 겪는 동안 우리 의료진이 보여준 창의적이고도 성공적인 이 검진 방식에 전 지구촌이 주목했다니 의료진의 노고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하염없이 꽃터널만 드라이브 스루하다 화원엔 들르지도 못한 채 귀가합니다. 목이라도 추길 겸 봉지에서 사과를 꺼내는데 썩은 것이 눈에 띕니다. 한두 개가 아니라 좋이 삼분의 일은 검은 구멍이 송송 나있습니다. 에누리 없는 장사 없다지만 속임수 없는 이문 또한 불가능한 것일까요. 시골할머니에게 장삿속이 있을 리 만무하다고 믿는 것은 사랑이 로맨스만으로 이뤄진 거라고 착각하는 것만큼이나 어리석은 일이 되어 버렸네요. 순박한 꽃을 입은 악덕에 상처 받은, 착할 마음이 조금도 없었던 저는 괜히 꿀꿀해집니다.

가만 되돌아봅니다. 더 싸고 맛난 과일을 접수할 수 있을 거라고 설레발친 것은 제 마음이었지요. 할머니가 저를 속인 게 아니라 제가 스스로를 속인 셈이지요. 욕심 낀 마음이야말로 가장 속이기 쉬운 상대니까요. 뭔가 잘못 되어 가고 있다면 스스로를 속일 때야 가능한 일임을 알겠습니다.

눈 마주치고 손 맞잡는다고 다 좋은 건 아닙니다. 사람 모인 곳이 항시 비로드 조각보처럼 포근하거나, 데워진 찻잔처럼 따뜻하지만은 않습니다. 내 한 가슴에서 두 심장이 뛰면, 한 입에서 두 혀가 움직

김살로메소설가
김살로메소설가

이는 화답으로 돌아올 수 있는 게 사람입니다. 반대로 직접 부딪히지 않더라도 신용이란 끈으로 선한 결과를 얻을 수도 있는 게 관계입니다. 긴가민가하지만 결과적으로 단호한 믿음을 주고, 갸우뚱대지만 결국 정한바대로 얻을 수 있는 드라이브 스루 같은 것 말입니다. 물리적 대면이 없다고 해서 마음마저 드라이브 스루하는 건 아니니까요.

머잖아 식당, 건강검진, 은행 등 도처의 업무에 드라이브 스루가 적용될 날이 오겠지요. 하지만 제 아무리 드라이브 스루 서비스에 동조하는 저 같은 이라도 그 바퀴 굴리고 싶지 않은 분야도 있답니다. 이를테면 꽃 터널에 갇혀 못다 본 봄꽃 거래라면 드라이브 스루만은 피하고 싶습니다. 눈으로 느끼고, 손으로 맛보며, 코로 만질 수 없는 방식이라면 전혀 위안이 되지 않는 것들이 우리 곁엔 있으니까요. 달디 단 꽃잎 옆에는 벌 나비가 바싹 붙을수록 섭리에 가까운 거잖아요.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