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재휘 논설위원
안재휘 논설위원

교육부 정책기획관이던 나향욱 씨는 취중 실언으로 극심한 고초를 겪는 안타까운 인물이다. 그는 지난 2016년 7일 서울 종로의 한 식당에서 진보언론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민중은 개돼지다. 99%에 해당하는 민중은 먹고살게만 해주면 된다”고 망언한 것으로 보도돼 파면당했다. 재판에서 겨우 승소해 강등 복직했지만, 여전히 참담한 처지에 놓여 있다.

‘개돼지’라는 말이 갖는 모욕적 이미지는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 폭풍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촛불집회 현장의 단골 선동 문구의 하나로 등장했었다. 그런데 4·15총선 선거가 시작된 이래 ‘개돼지’라는 말이 정치권에 또다시 등장했다. 각기 동원하는 용도는 다르지만 이제 정치권에서 ‘개돼지’ 용어가 상대방을 공격하는 논리에 동원되는 일은 흔하다.

인천을 방문한 유승민 미래통합당 의원은 코로나19 사태가 블랙홀이 된 선거판을 지적하며 “상스러운 표현이지만, 우리 국민은 절대 ‘개돼지’가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이재명 경기도지사도 정치권의 법인세 감면 주장에 대해 “‘개돼지’ 취급당하며 말라버린 낙수에 더 이상 목매지 말자”고 목청을 높였다.

정치권이 써먹는 ‘개돼지’는 유권자들을 흥분시키려는 단골 선동언어가 됐으나, 정작 천박한 행태로 보면 정치권의 의식 자체가 더 의심스럽다. 이번 선거전에 나타난 ‘위성 정당’ 논란만 해도 그렇다. 제1야당을 배제하고 만든 준연동형비례대표제는 1당독재 국가에서나 존재하는 위성 정당들을 양산했다. 급조된 통발 정치는 국민을 ‘개돼지’로 여긴 추악한 만행으로 역사에 남을 것이다.

여당의 막강 대권 주자 이낙연 선관위원장의 “비난은 잠시지만 책임은 4년간 이어질 것”이라는 말을 들으며 문득 떠올랐다. 나향욱이 인용했다는, 영화 ‘내부자들’에 등장하는 대사다. “어차피 대중들은 ‘개돼지’들입니다. 뭐하러 ‘개돼지’한테 신경을 쓰시고 그러십니까. 적당히 짖어대다가 알아서 조용해질 겁니다” 정치꾼들의 진짜 속마음이 대략 이런 수준 아닐까.

패거리 의식에 찌들어 자기편이면 무조건 칭찬하고, 아무리 좋은 일이어도 상대편의 언행은 비틀고 물어뜯는 극단적인 내로남불 행태야말로 진짜 ‘개돼지 행각’이다. 국민의 시시비비(是是非非) 정신을 모조리 증발시킨다는 측면에서 이 나라의 정치인 팬덤 현상은 비극이다. 그 폐해가 노골적으로 드러나고 있는 4·15총선 양상은 이 나라 민주주의의 위기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총선을 앞둔 유권자들의 고통은 모름지기 ‘물고문’ 수준이다. 누군가를 선택해야 하는 일 자체가 고역이다. 하지만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은 이번에 우리는 지혜로운 ‘개돼지 우리’ 탈출기를 써야 한다는 사실이다. 권력층의 오만방자한 행태를 엄중히 심판해야 한다. 쏟아지는 포퓰리즘의 우박 세례를 이겨내고 이 ‘개돼지’ 굴욕 딱지를 확실하게 떼어내야 한다. 우리는 결코 ‘적당히 짖어대다가 알아서 조용해지는’ 하찮은 하등동물이 아님을 증명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