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이야기’와 이기철 시인

환한 등불처럼 피어난 벚꽃 아래 맑은 강이 흐르는 4월이 왔다.
환한 등불처럼 피어난 벚꽃 아래 맑은 강이 흐르는 4월이 왔다.

학생들의 일상 자체가 마비된 상황이 오래 지속되고 있다. 방학 동안 얼굴 보지 못했던 친구들과 만나 반가운 인사 나눌 때를 이제나저제나 기다려왔지만, 4월이 왔음에도 온전한 개학은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

아직은 혼자서 모든 걸 해내는 게 서툰 초등학교 저학년 아이를 둔 맞벌이 부모들은 마음 놓고 자식을 맡길 곳을 찾지 못해 전전긍긍이다.

조금 컸지만 중학생과 고등학생도 형편은 비슷하다. 학교를 가지 않으니 하루 종일 핸드폰만 들여다보는 아들, 딸과 신경전을 벌인다는 부모가 적지 않다.

학원을 보내려고 해도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은 어쩐지 불안스럽다. 모두가 두려워하는 ‘접촉으로 인한 감염’ 탓이다.

학생만이 아니다. 교사들의 고충도 적지 않을 듯하다. 사람은 자신이 서야 할 자리에 있어야 마음이 편한 법. 익숙한 교단이 아닌 컴퓨터 모니터와 연결된 카메라 앞에서 어색한 표정으로 ‘강의용 동영상’을 만들며 밤을 새는 교사와 교수가 많다는 뉴스가 들려온다.

갑자기 등장해 한순간에 세계를 멈춰버린 강위력한 바이러스가 사람들 삶의 형식은 물론, 내용마저 바꾸고 있다.

 

 

벚꽃 그늘에 앉아보렴

이기철

벚꽃 그늘 아래 잠시 생애를 벗어 놓아보렴

입던 옷 신던 신발 벗어놓고

누구의 아비 누구의 남편도 벗어놓고

햇살처럼 쨍쨍한 맨몸으로 앉아보렴

직업도 이름도 벗어놓고

본적도 주소도 벗어놓고

구름처럼 하이얗게 벚꽃 그늘에 앉아보렴

그러면 늘 무겁고 불편한 오늘과

저당 잡힌 내일이

새의 날갯짓처럼 가벼워지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벚꽃 그늘 아래 한 며칠

두근거리는 생애를 벗어 놓아보렴

그리움도 서러움도 벗어놓고

사랑도 미움도 벗어놓고

바람처럼 잘 씻긴 알몸으로 앉아보렴

더 걸어야 닿는 집도

더 부서져야 완성되는 하루도

도전처럼 초조한 생각도

늘 가볍기만 한 적금통장도 벗어놓고

벚꽃 그늘처럼 청정하게 앉아보렴

그러면 용서할 것도 용서받을 것도 없는

우리 삶

벌떼 잉잉거리는 벚꽃처럼

넉넉해지고 싱싱해짐을 알 것이다

그대 흐린 삶이 노래처럼 즐거워지길 원하거든

이미 벚꽃 스친 바람이 노래가 된

벚꽃 그늘로 오렴.

 

▲‘바이러스의 시대’를 사는 불행한 젊은이들

이러니저러니 해도 볕 좋고 꽃향기 가득한 이 빛나는 4월에 가장 불쌍해 보이는 건 스무 살 청춘들이다. 기승을 부리는 ‘코로나19’가 아니었다면 갓 대학에 들어가거나,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을 이들. 그들이 꼼짝없이 방 안에 갇힌 2020년 4월.

한 세대 전 스무 살을 보낸 젊은이들은 어땠을까? 기자의 경험과 기억에 의하면 4월은 눈부신 달이었다. 따스한 바람에 화들짝 놀라 급하게 망울을 터뜨린 벚꽃. 그 아래서 친구들과 막걸리를 마시거나, 버스를 타고 나간 교외에서 너무나 관능적인 빛깔의 복사꽃과 만나는 계절.

마치 폭설처럼 시야를 가리던 연분홍 벚꽃 잎들. 그걸 배경으로 “우리네 젊은 날도 언젠가는 저렇듯 허무하게 지겠지”라는 너스레를 떨며 슬그머니 연인의 손을 잡던 20대 청춘들.

2020년과 달리 20세기의 젊음은 고통스러웠기에 아름다울 수 있었다. 그랬다. 그런 역설과 반어가 통하던 시절이었다.

답답하고 갑갑한 현실은 좋았던 과거를 떠오르게 한다. 그 호시절의 재료가 돼준 영화와 노래도 더불어 기억 속에서 불러오게 된다. 낭만이 거세된 4월을 살고 있는 지금의 스무 살 청춘들에겐 어떤 영화와 노래가 어울릴까? 주제넘지만 추천해 볼까. 먼저 영화 이야기다.

 

▲빛나는 낭만을 다룬 영화 ‘4월 이야기’

벚꽃이 눈처럼 시야를 가리는 도쿄 근교의 작은 도시 무사시노(武藏野).

홋카이도 시골에서 그곳 대학에 들어온 신입생 니레노 우즈키를 가장 먼저 반긴 건 “당신은 빛나는 벚꽃보다 아름답습니다”라고 적힌 예쁜 플래카드다.

일본에 대한 관심이 있는 관객들에게 ‘무사시노’는 그리 낯설지 않은 곳이다.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피터 캣(Peter Cat)이란 카페를 만들어 끈적이는 찰리 파커와 마일즈 데이비스, 존 콜트레인의 쿨 재즈를 밤낮없이 틀어대던 도시. 무사시노 미술대학에서 공부한 무라카미 류의 매력적인 소설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의 무대가 된 도시.

바로 이 무사시노에서 이와이 슌지는 “세상은 사랑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울 수 있다”라는 메시지를 담은 영화를 만든다. ‘4월 이야기’다.

카메라는 시종일관 첫사랑인 고등학교 선배를 잊지 못해 무사시노까지 와서 같은 학교에 입학한 니레노 우즈키를 쫓아다닌다.

이와이 슌지의 렌즈 속에 담긴 세상은 아름답기 그지없다. 도시를 뒤덮은 연분홍 벚꽃, 새내기들의 밝고 활기찬 웃음, 넓고 푸른 잔디밭, 거기에 스크린의 색감까지 은은한 황갈색이 감도는 낭만적인 톤이다.

세상과 사람에 대한 기대와 설렘은 보편적이다. 그건 한국과 일본이 다를 수 없다.

최인호의 소설 ‘겨울 나그네’를 읽고는 자전거를 사고, 그 자전거에 부딪쳐줄 소녀를 찾아 교정을 누비던 스무 살 청년들. 그런 로맨스는 상상 속에서나 존재하는 것임을 알게 되기까지 그들에겐 시간이 필요한 법.

영화 ‘4월 이야기’는 단조롭고 심상하다. 근사한 남자 선배를 보기 위해 무사시노를 찾아온 예쁜 후배. 새롭게 만나는 사람들과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게 어색하고 서투르다. 차마 좋아한다는 말은 하지 못하고, 선배의 곁을 서성이기만 하는 여린 마음. 그리고, 마침내 흩뿌리는 봄비 아래서 이뤄지는 스무 살의 첫사랑.

이 영화는 “사랑이 아름다운 것은 사람이 아름다워지기 때문”이란 아주 당연한 진리를 느릿느릿하며, 쉽고, 아름답게 우리 귀에 속삭여준다.

그래서일까? 작위적인 벚꽃 날림의 연출도, 서툴게 보이는 조연들의 연기도, 여배우가 직접 연주했다는 초등학생 수준의 피아노 솜씨도 용서가 가능해진다.

선과 악의 대립 구조도, 갈등과 화해의 드라마도, 그 흔한 악역 하나 등장하지 않는 밋밋한 영화 ‘4월 이야기’.

그러나 상영 시간 내내 관객은 이와이 슌지 감독이 의도한 ‘사랑과 그로 인한 가슴 흔들림’에 동화된다.

그래서다. 바이러스가 횡행하는 바깥을 피해 방 안에 갇혔지만, 사랑과 낭만을 꿈꿀 것이 분명한 세상 모든 스무 살에게 ‘4월 이야기’의 속삭임을 소개하고 싶다. 이런 것이다.

“누구에게나 인생은 한 번이다. 그러니 네 영혼이 시키는 대로 살아라. 사랑을 배우고 익히고 행하라. 그것만 하기에도 인간의 삶은 짧다.”

▲조금은 느긋한 마음으로 봄을 기다린다면….

벚꽃이 도시 전체를 핑크색으로 물들이는 경북 경주와 경남 진해는 물론, 꽃놀이 인파로 걷기조차 힘들었던 서울 여의도까지 “제발 찾아오지 말아주세요”라며 관광객을 마다하는 희귀한 풍경이 연출되고 있는 요즈음.

마음으로나마 아직 도착하지 않은 봄과 벚꽃을 마주하려는 청춘들에게 시 한 편을 선물하려 한다.

‘무겁고 불편한 오늘과/저당 잡힌 내일’을 잠시 잊고 ‘그리움도 서러움도 벗어놓고/사랑도 미움도 벗어놓고’ ‘흐린 삶이 노래처럼 즐거워지길’ 바란다면 조용히 혼자서 읊조려 보시기를.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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