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수백 대구가톨릭대 교수·한국어문학과
서수백 대구가톨릭대 교수·한국어문학과

내가 맡고 있는 강의 중 책을 읽은 후 다양한 관점의 의견을 나누고, 토론을 하면서 세상과 삶에 대한 이해를 도모하고자 하는 수업이 있다.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를 읽고 토론하는 시간이었다. ‘멋진 신세계’는 기계문명이 인간을 지배하게 되고 그것은 인간성이 말살되는 공포의 세상을 자초한다는 경고를 보내는 공상과학소설이다. ‘4차 산업혁명의 시대’로 일컬어지는 지금, 이 소설의 이야기는 우리를 긴장시키기에 충분하다. 1932년에 이 소설을 쓴 작가의 선견지명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작가의 경고는 소설에서 두 가지 상반된 세계를 통해 전해진다. 첫 번째 세계는 ‘문명세계’이다 ‘문명세계’의 인간은 ‘보카노프스키’라는 인공부화로 태어나 철저하게 계급화되어 기계적으로 살아간다. 이 ‘문명세계’의 사람들에게는 질병이나 노화, 슬픔이나 절망, 삶의 성취나 죽음에 대한 감정도 없다. 언뜻 보면 스트레스를 전혀 느끼지 않고 편안하게 살아가는 모습이다. 그것은 마약 ‘소마’로 인한 것이다. 반면에 두 번째 세계 ‘야만세계’의 인간은 결혼과 출산을 하고, 삶의 욕망도 있고 종교도 있으며 셰익스피어의 작품도 읽는다. 나는 학생들에게 이 두 세계 중 자신이 살고 싶은 세계는 어떤 세계냐는 질문을 했다. 어느 것도 예상하지 않았지만 학생들의 반응에 나는 조금 놀랐다. ‘문명세계’에 살고 싶다는 학생이 훨씬 많았기 때문이다. ‘문명세계’에 살고 싶다는 학생들은 대부분 너무 편할 것 같다는 것이 이유였다. 소설 속 ‘문명세계’ 사람들은 사는 데 아무런 불만도 없으니 말이다. ‘야만세계’에서 살고 싶다는 학생들은 인간에게 ‘희로애락은 삶의 가치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스트레스가 만병의 근원이 되어 ‘암 걸릴 것 같다’는 말이 유행어가 될 정도인 이 시대에서 그래도 ‘야만세계’에 살아야 한다는 학생들이 그저 기특하게 여겨지고, ‘문명세계’에 살고 싶다는 학생들에게는 왠지 모를 애처로움이 느껴졌다. 나의 고정관념일지도 모르겠다.

기계문명의 발달은 우리를 엄청난 편리함으로 이끌었고 자부심도 가지게 했다. 그 위력에 빠져 우리 스스로 지나간 우리의 삶을 한심하게 여기기까지 한다. 소설 속 ‘문명세계’가 결코 상상의 세계는 아닌 듯하다. 자신의 어머니가 학대받던 ‘야만세계’에 치를 떨며 ‘문명세계’를 향해 ‘오오, 멋진 신세계’를 외치며 떠났던 존에게‘문명세계’는 구역질나는 곳이었다.‘야만세계’의 습관을 버리라는 ‘문명세계’ 통치자 무스타파 몬드와 치열한 설전을 하고 ‘야만세계’로 돌아왔지만 결국 두 세계의 혼동 속에 자살로 생을 마무리하는 존을 누군가는 심한 향수병을 앓는 인물로, 또 이율배반적인 인물로, 또 기계문명 앞에 안타깝게 희생되는 인물로 이해한다. 나에게도 존은 역시 조금 답답한 인물이다. 나날이 변화하는 세계 앞에 우리의 시야를 어느 한쪽에 가두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을 다시금 한다. 허겁지겁 달려가는 인생에서 나는 ‘아차!’하는 순간을 나의 학생들과 함께 하며 또 한번 겪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