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지은 공무원

희망이란 ‘어떤 일을 이루거나 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뜻한다. 어떤 일을 이루려면 하고 싶은 ‘생각’이 선행해야 하고 ‘실행’이 뒤따라야 한다. 생각을 움직이는 것은 우리 마음이다. 그러므로 희망은 머리와 가슴 사이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해마다 반복하는 3대 국민 결심은 금연, 다이어트, 영어공부다. 수많은 사람들이 해마다 새롭게 결심하지만 쉽게 이루지 못한다.

희망을 이루기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누구나 무언가를 결심하고 야심 차게 시작하지만 쉽게 보이지 않는 성과에 실망하고 좌절한다. 결국 이런저런 합리적 핑계를 만들어 포기하고 만다. 이런 단계를 넘어서기 위해 성취하는 과정을 즐기는 태도가 필요하다. 목표를 잘게 쪼개 우선 임계점까지 도달하기까지 과정을 잘 설계하면 작은 성취감을 즐기며 희망에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설 수 있다.

‘희망’이라는 것은 태고로부터 인간이 극한의 고통을 견디어 낼 수 있도록 고안해낸 일종의 자기 최면 기술은 아닐까? 호모 사피엔스가 세계를 지배할 수 있었던 이유는 보이지 않는 것을 상상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유명한 역사학자가 말했다. 샤먼이 생겨나고, 그것을 구심점으로 사람들은 모여 협업할 수 있었으며, 이런 행동 양식은 인간으로 하여금 다른 동물들보다 우위에 있도록 만들었다. 희망도 그런 맥락에서 인류를 움직인 원동력 중 하나가 아니었을까?

인생의 중반을 지나고 있는 내게는 욕망의 숫자가 있다. 그 숫자는 95 그리고 800이다. 95는 내가 욕망하는 티셔츠 사이즈다. 태어나서 단 한 번도 평균 몸무게였던 적이 없었던 나는 100이라는 숫자 아래의 티셔츠를 입어보는 것이 간절한 소망이다. 95는 번번이 실패하는 다이어트에 대한 내 희망의 숫자다. 올해로 오십에 도달한 나는 800이란 숫자를 갈망한다. 800은 내가 받고 싶은 토익 점수다. 토익 900점이나 만점자도 넘쳐나고, 토익 스피킹, 오픽 같은 말하기 시험도 있는데, 왜 하필이면 토익 800점이 내 욕망의 숫자일까? 필자가 대학생이던 90년대 초반에는 이 점수가 요즘 토익 900에 해당하는 꿈의 점수였기 때문이다. 토익 800점은 열심히 살지 않고 무심히 흘려보낸 내 젊은 날에 대한 후회를 치유해 주고 싶은 숫자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희망을 이룰 수는 없을까? 나는 선천적으로 몸을 움직이는 것을 싫어하고, 무엇인가 반복하는 행동에 쉽게 싫증을 낸다. 어느 날 아침 잠에서 깨어났는데 날씬한 몸으로 바뀌어 있고, 원어민 수준의 영어를 구사하는 내 모습을 상상하면 기분이 좋아진다.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희망하는 일을 이루려면 무엇인가를 시작해야 한다. 그것을 계속 반복할 수 있는 에너지가 있어야 한다. 인내심을 갖고 희망이 마음에서 떠나지 않도록 붙잡아야 한다.

희망의 시작은 나 자신이다. 최초의 희망은 내 머리에서 싹이 트고 내 가슴 속 열정이 싹튼 희망을 계속 품을 수 있게 한다. 결국 내 생각이 가장 중요한 희망의 씨앗이다. 훌륭한 생각을 하기 위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완전한 무(無)에서 유(有)를 만들어 낼 수는 없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벤치마킹이다. 그 방법 중 하나가 인생을 지혜롭게 살았던 사람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는 것이다. 지혜로운 옛사람의 길을 따라가고, 내 삶에 녹여내 발전시키기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는 나는 고전을 손에 붙잡고 살아간다.

고전은 우리에게 선뜻 답하기 어려운 난감한 질문들을 던진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생각하면서 우리의 사고는 조금씩 넓어지고 유연하게 변한다. 가장 강한 자는 힘 있는 자도 아니고, 지식이 많은 자도 아니다. 환경의 변화에 가장 잘 적응하는 자가 가장 강한 사람이다. 인공지능과 로봇, 유전공학으로 숨 가쁘게 돌아가는 4차 산업혁명의 벽두에 선 우리는 변화에 적응해야 한다. 생존을 위해서라도 유연한 사고는 필수적이다. 그래서 고전을 손에서 놓지 않고 책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에 답을 하는 연습을 멈추지 않기로 결심한다. 희망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지금, 바로, 이 자리에서 실천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의 하나는 고전 읽기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