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래<br /><br />시조시인<br /><br />
김병래

시조시인
 

우수와 경칩을 지나 봄이 성큼 다가선다. 가뜩이나 경제가 어려운 형편에다 전염병까지 창궐해 온 나라가 아우성인데, 그런 사정에는 아랑곳없이 봄은 오고 있다. 올해도 어김없이 만물이 소생하는 새봄을 펼쳐 놓을 테니 인간사는 너희가 알아서 하라는 자연의 섭리다.

봄을 가장 봄답게 하는 것은 무채색의 들판을 푸르게 물들이는 온갖 풀들이다. 그 중에서 우리 민족의 정서에 가장 깊이 닿아있는 풀을 하나만 고르라면, 나이든 사람들 중 대다수는 쑥을 들지 않을까 싶다. 곰이 쑥과 마늘을 먹고 우리의 조상이 되었다는 단군신화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삶과 가장 밀접한 풀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쑥은 먹을 수 있는 가장 흔한 풀이다. 먹고살기 어려운 시절엔 봄이 오기를 기다려 들에 나가 쑥을 뜯어다가 끼니를 때우곤 했다.

쑥은 여러 가지 음식의 재료일 뿐 아니라 약효도 많다. 동의보감에는 위장과 간장, 신장의 기능을 강화해 복통치료에 좋고, 피를 맑게 하며 살균, 진통, 소염 등의 작용과 냉·대하, 생리통 등 부인병에도 좋다고 한다. 말린 잎을 비벼서 뜸을 뜨는 데 쓰기도 하고 단오에는 잡귀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문간에 걸어두기도 한다. 아마도 그런 약효의 원천은 쑥이 가진 왕성한 생명력에 있는 것 같다. 어디든 빈터가 있으면 선착순 뿌리를 내려 소위 쑥대밭이 된다. 더구나 여린 싹이 아스팔트를 뚫고 나오는 걸 보면 경악을 금치 못한다. 마른 쑥대 하나가 달고 있는 씨앗은 아마 수만에서 수십만은 될 것이다. 늦가을과 초겨울에 하늘 가득 씨앗을 날려 보내니 어느 땅인들 쑥의 영토가 아니겠는가.

냉이도 이른 봄에 들판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나물이다. 산과 들에 봄나물이 많지만 쑥과 냉이가 그중 흔하다. 가을에 싹을 틔워 월동을 하는 냉이도 강인한 생명력으로는 쑥에 못지않다. 겨울 혹한에 얼어 죽은 듯하다가도 날이 풀리면 생기를 띠고 돋아난다. 뿌리째 뽑아서 국을 끓이거나 데쳐서 무쳐 먹는 봄의 별미다. 어려운 시절에야 물론 구황식물의 하나였지만. 식용식물이 다 그렇듯 냉이 역시도 ‘본초강목’에 역을 풀고, 풍을 제거하고, 눈을 밝게 하며, 오장을 보하는 등의 약효가 있다고 나와 있다.

오늘 들에 나가 냉이를 캐고 쑥을 뜯어다 쑥국을 끓이고 냉이무침을 만들었다. 된장을 푼 물에다 멸치를 몇 마리 넣고 끌이다가 쑥을 넣으면 쑥국이 되고, 끓는 물에 데친 냉이를 다진 마늘과 된장과 참기름을 넣고 버무리면 냉이무침이다. 쌉쌀한 쑥의 맛과 달짝지근한 냉이의 맛은 정서를 편하고 담담하게 한다. 식탐이나 과식을 걱정할 필요 없는 소박한 맛이다. 지금 우리에게 쑥과 냉이는 봄철 입맛으로나 먹는 나물이지만, 기근이 들어 끼니를 잇기 어려운 백성들에게는 지천인 풀이면서 먹을 수가 있다는 게 얼마나 고마운 일이었을까. 전염병으로 국경이 차단된 북쪽에서는 아직도 굶주리는 사람들이 많다니, 쑥이나 냉이로 주린 배를 채우는 사람인들 없겠는가. 아무쪼록 이봄 북녘 들판에 쑥과 냉이라도 풍성하게 돋아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