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포항을 사랑한 작가’ 한흑구 <하>

한흑구의 대표작 중 하나인 ‘젊은 날의 시’.

로마 시대 스토아 철학을 대표하는 세네카(BC 4년 추정-65년)는 “모든 예술은 자연의 모방에 불과하다”고 했으며, 불멸의 화가 빈센트 반 고흐(1853년-1890년)도 “자연에 대한 사랑을 유지하라. 그렇게 하는 게 예술을 더 깊게 이해하는 진정한 방법이다.”라고 말했다. 두 선인의 말은 해방 이후 한흑구 수필을 해명하는 나침반과도 같은 명언이다.

 

…일제시대 ‘흑구’가
죽어도 변치 않는 애국심을 지닌
청년을 형상화한 것이었다면,
해방 이후
포항에 정착한 이후의
‘흑구’는 한가롭게
동해 바다를 떠다니는
지족의 현인을 떠올리게 한다.…

해방 이후 한흑구는 월남하여 서울에서 미군정의 통역을 맡으면서 살아간다. 그러다가 1948년 경주로 여행하러 가는 길에 우연히 포항 바닷가에 들렀다가 그 아름다운 풍경에 반하여, 아예 그곳에 정착한다.(이강언·조두섭, ‘대구경북 근대문인연구’, 태학사, 1999, 295면) 포항에 정착한 이유가 보여주듯이, 이후 그의 문학세계는 자연의 아름다움에 깊이 천착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해방 이전 다양한 방면에서 활동하던 한흑구는 해방 이후에는 주로 수필에 자신의 창작열을 집중한다. 총 31편의 수필(한흑구 문학선집(민충환 엮음, 아시아, 2009)과 한흑구 문학선집Ⅱ(민충환 엮음, 아르코, 2012)에 수록된 수필의 합계) 중에서 해방 이후에 발표된 것은 24편인데, 이 수필들의 제목은 ‘닭 울음’, ‘나무’, ‘여름 단상’, ‘보리’, ‘눈’, ‘비가 옵니다’, ‘감’, ‘진달래’, ‘밤을 달리는 기차’, ‘새벽’, ‘길’, ‘제비’, ‘동해산문’, ‘한여름 대낮의 움직임과 고요’, ‘코스모스’, ‘석류’, ‘들 밖에 벼 향기 드높을 때’, ‘흙’, ‘노목을 우러러보며’, ‘낙엽과의 대화’, ‘봄이 오면’, ‘흰 목련’, ‘나의 필명의 유래’, ‘모란봉의 봄’이다. 이러한 제목들은 한흑구의 해방 이후 수필이 한두 편을 제외하고는 자연을 그 대상으로 삼았음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자연을 대상으로 한 한흑구의 수필에는 예술적 감동을 자아내는 아름다운 문장들이 빼곡하다. 몇 가지만 꼽아보면, 비오는 날의 보리를 “보리 수염들이 파랗게 버티고 서서 은구슬 같은 빗방울들을 하나하나 줄줄이 꿰고 있습니다.”(‘비가 옵니다’, 1956)라고 표현하거나 나무들과 온갖 초목들을 “7색 무지개의 빛을 지닌, 하나의 커다란 옷”(‘감’, 1956)에 비유한 것을 들 수 있다.
 

흑구문학관에 전시된 사진들.
흑구문학관에 전시된 사진들.

또한 봄의 샘물소리를 “마치 갓난애의 손가락같이 보드러운 감촉을 느끼게 하는 그 새맑은 소리”(‘봄이 오면’, 1975)라고 표현한 것도 참으로 인상적이다. 이렇게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문장들은 작가가 자연과 짙은 교감을 나누었을 때만 탄생할 수 있는 것들이다.

이 대목에서 필명 ‘흑구’는 새로운 의미를 지니게 된다. 일제시대 ‘흑구’가 죽어도 변치 않는 애국심을 지닌 청년을 형상화한 것이었다면, 해방 이후 포항에 정착한 이후의 ‘흑구’는 한가롭게 동해 바다를 떠다니는 지족의 현인을 떠올리게 한다. ‘나의 필명의 유래’에도 마지막 부분에 유유자적하는 갈매기의 모습을 재미있게 언급하는 대목이 나온다. “우리가 조국의 광복을 찾은 뒤에, 검은 갈매기들이 사라호 태풍에 밀리어서 동해에까지 날아와 살게 되었”으며, 그들은 “제비와 같은 철새는 아닌지 그대로 남아서, 푸르고 고요한 동해를 즐기면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조국의 광복 뒤에 동해에 와서 “푸르고 고요한 동해를 즐기면서 살아가는” 검은 갈매기야말로 한흑구의 해방 이후 모습에 그대로 대응한다.

 

한흑구 젊은 시절
한흑구 젊은 시절

해방기에 쓰여진 수필에는 해방 이전의 ‘흑구’와 포항 정착 이후의 ‘흑구’가 함께 나타난다. 식민지 시기 애국청년이었던 이력을 증명하듯이, 자연을 통해 나라와 겨레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는 것이다. 해방 이후 처음 발표된 ‘닭 울음’(1946)에서는 닭 울음과, 해방 2주년의 국경일을 맞이하여 “한 마음 한 뜻으로 새로운 국가를 이룩하리라”는 희망으로 부르는 애국가를 연결시킨다. 이듬해에 발표된 ‘나무’(1947)도 “잎마다 잎마다 햇볕과 속삭이는 성장(盛裝)한 여인과 같은 나무”의 아름다움과 “성자(聖者)와 같은 나무”의 후덕함을 감각적이고 유려한 문장으로 찬미한다.

동시에 미국에 망명 중이던 아버지가 편지마다 썼던 “너는 십일홍(十日紅)의 들꽃이 되지 말고, 송림(松林)이 되었다가 후일에 나라의 큰 재목(材木)이 되라”는 구절을 떠올린다. 한흑구의 대표작으로 회자되는 ‘보리’(1955)에서도 “모든 고초와 비명”을 견뎌낸, 그리하여 “항상 그 순박하고, 억세고, 참을성 많은 농부들과 함께, 이 땅에서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보리는 식민지와 전쟁을 이겨낸 우리 민족을 자연스럽게 환기시킨다.

인생의 말년에 창작된 수필에서는 ‘푸르고 고요한 동해를 즐기면서 살아가는 검은 갈매기’ 한흑구의 모습이 보다 뚜렷해진다. ‘한여름 대낮의 움직임과 고요’(1971)에서는 “오늘과 같이 조용한 날엔 고요한 바다 위를 떠오르는 해가 보고 싶다”며 “송도(松島)의 다리를 건너고, 새로 심은 플라타너스들을 눈여겨보면서 영일만(迎日灣) 사장(沙場)”까지 걸어간다. ‘노목(老木)을 우러러보며’(1974)에서는 청하에 있는 보경사(寶鏡寺) 앞뜰에 앉아서, 하늘 높이 솟아오른 느티나무를 바라보며 자연을 향한 외경심을 느낀다. ‘흰 목련’(1975)에서는 보경사에서 “두부장수의 손종을 거꾸로 세워 놓은 듯한 모양” 같기도 하고, “옥수수 이삭을 짜개서 펼친 듯한 모양” 같기도 한 목련에 취하기도 한다.

그러나 한흑구의 자연을 대상으로 한 수필이 감각과 감상으로만 가득찬 음풍농월(吟風弄月)에 머무는 것은 아니다. 거기에는 우주적 규모의 형이상학이 존재하니, 그것은 다름 아닌 생태주의이다. 생태주의(ecology)는 지구라는 생태계가 그 안의 모든 생명들이 분리될 수 없는 필연성으로 깊이 연결된 유기적 통일체라는 사실에 근거한다. 자연을 인간의 대상으로만 여기는 인간중심주의를 배격하고 인간도 생태계의 일부로서 자연과 상호관계를 맺는 존재에 불과하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다. ‘동해산문’(1971)과 ‘흙’(1974)에는 생태주의의 기본 입장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표현이 여러 곳에 등장한다.

‘동해산문’에는 “이 지구 위에서 인간이라는 동물들은 흙에서 나오는 것을 먹고, 물에서 나오는 것을 먹으면서 살아간다. 모든 다른 생물들도 흙과 물에서 살고, 또한 흙으로 돌아가야 하는 운명을 지니고 있다. 이 운명을 도피할 자는 이 지구 위에는 하나도 존재할 수 없다”고 하여 유기체로서의 지구를 강조한다. 또한 “깊고 넓은 볼륨 속에는 모든 생물들과 인간의 슬픈 역사가 고이 간직되어 있는” 바다에 비할 때, “나는 한낱 인생인 것이다”라고 하여 인간중심주의와는 거리가 먼 모습을 보여준다. ‘흙’에서도 “사람은 흙에서 나서, 흙에서 나오는 것을 먹으면서 살다가 다시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 다른 모든 생물들이 하는 것과 같은 하나의 본연의 자세”인데, “이제 사람은 흙에 대한 애정을 잃어가”서 “지구의 피부와 살을 다 뜯어먹고, 긁어먹고, 자기의 한 몸뚱이를 영원히 담아서 쉬게 할 곳도 없는 슬픈 존재가 되어가고 있다”고 한탄한다.

본래 생태주의는 급격한 산업화로 인해 자연이 파괴되는 급박한 상황 속에서 인류의 지속적인 생존을 담보하고자 하는 시대적 열망에서 탄생한 사상이다. 한국 문학에서 생태주의적 문제의식이 본격화 된 것이 1990년대 이후라는 것을 생각할 때, 한흑구의 수필은 매우 선구적인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한흑구의 수필에서 생태주의적 입장이 본격적으로 드러나는 시기가 1970년대라는 것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때는 한국 전체는 물론이고, 그가 뿌리내리고 사는 포항이 거대한 산업도시로 변모한 시기이기 때문이다.

 

한흑구 시선.
한흑구 시선.

한흑구의 포항 생활은 한 명의 문인으로서나 인간으로서 복된 시간이었음에 분명하다. 그러나 달관의 성자 한흑구도 어쩔 수 없는 아픔은 있었던 것 같다. 그것은 다름 아닌 실향민으로서의 향수이다. 그동안 주목받은 적은 없지만, 그의 수필에는 실향민의 정서가 곳곳에 묻어난다. 봄을 맞아 꽃을 피운 진달래를 보며 “어릴 때에 보던 모란봉 위의 진달래”와 “영변 약산 동대의 진달래”(‘진달래’, 1957)를 떠올리며, 서울을 떠나 부산으로 가는 밤 열차에서 “죽어도 집에 가서 죽는다”며 퇴원을 한 노인을 보면서 “이북에 있는 나의 집을 한번 다시 머릿속으로 그려”(‘밤을 달리는 열차’, 1957)보는 식이다.

이러한 향수는 시간이 갈수록 더욱 깊어지고 생생해진다. 제비를 보며 “집과 고향은 자기가 난, 단 하나의 곳이기 때문에 죽을 때까지도 그리워하는 것일까?”라며 “깊은 노스탤지어”(‘제비’, 1969)에 사로잡히고, 벼가 익어가는 계절을 맞이하여 자신의 유년기를 회고하며 “38 이북에 두고 온 내 고향과 어린 시절의 낭만과 꿈을 되찾을 길이 없다.”는 “설움”(‘들 밖에 벼 향기 드높을 때’, 1973)을 느낀다. 타계하기 일 년 전에 발표한 ‘모란봉의 봄’(1978)은 평양을 항공 촬영한 것처럼, 평양의 대표적인 명소가 생생하게 묘사된 수필이다. 수십 년의 세월이 지났어도 한흑구의 마음속에서는 금수산, 모란봉, 을밀대. 부벽루, 기자림 등이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남아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타계한 지 수십 년이 지난 지금, 작가의 영혼이나마 남과 북의 하늘을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기를 두 손 모아 빌어본다.

/문학평론가 이경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