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포항을 사랑한 작가’ 한흑구 <상>

수필은 물론이고 시와 소설, 평론, 논문, 번역 등 다방면에서 활동한 한흑구(본명 한세광韓世光, 1909-1979)는 포항을 대표하는 문인이다. 태어난 곳은 평양이지만 1948년 포항으로 이주한 이후 1979년 별세할 때까지 포항을 떠나지 않았다. 그는 포항에서 흐름회(1967), 포항문인협회(1970), 한국문인협회 포항지부(1979)를 창립하며 포항문학의 토대를 닦았다. 이를 기리는 많은 기념물이 포항에는 남아 있다. 청하 보경사 숲에는 한흑구 문학비가 1983년에 건립되었고, 2012년에는 호미곶 구만리에 한흑구 문학관이 조성되어 있다. 또한 두 권의 ‘한흑구 문학선집’이 만들어져, 그의 문학적 자취를 찾아보려는 이들에게 훌륭한 지침 역할을 해준다.

 

… 식민지 시기 한흑구는 참으로 단단한 정신과 해박한 지성으로 민족의 고단한 현실을 누구보다 깊이 있게 통찰한 수필을 남겼다.

그것은 한흑구의 본래 성품에서 비롯된 바도 있겠지만, 식민지라는 시대 상황이 서정보다는 지성을 긍정보다는 비판을 요구한 까닭이라고 할 수 있다. 시대의 아픔을 탁월한 수필로 승화시킨 한흑구는, 어두워져 가는 하늘 아래 고고하게 떠올라 날카롭게 지상을 응시한 한 마리 검은 갈매기였던 것이다.

포항에서 활동하던 무렵의 한흑구는 “온후하고 은둔적인 사색가”(서정주), “겸허와 달관으로 인생을 값있게 보내신 분”(수필가 빈남수), “겸허와 진실이 체질화된 사람”(손춘익) 등으로 불린다. 이러한 평가는 동양에서 가장 이상적인 인간상 중 하나인 은자(隱者)를 떠올리게 한다. 한흑구는 부귀공명에 집착하여 자신의 지조와 생명을 헐값에 팔아버리는 속인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인간형이었던 것이다. 끝없이 펼쳐진 푸른 바다를 유유자적하는 갈매기와 명리를 초월한 한흑구의 모습은 자연스럽게 어울린다.

그러나 이 흑구(黑鷗·검은 갈매기)라는 필명이 만들어진 계기는 낭만과는 조금 거리가 있다. 필명에는 조국 잃은 청년의 짙은 슬픔과 그것을 극복하고자 하는 강인한 신념이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청년 한세광이 1929년 3월 대양환(大洋丸: 2만 톤급의 여객선)을 타고 아버지 한승곤이 있는 미국으로 갈 때, 검은색 갈매기 하나가 일주일이나 쉬지 않고 쫓아왔다고 한다. 한흑구는 그 검은 갈매기와 자신의 모습이 두 가지 측면에서 같다고 보았다. 첫 번째는 “옛 길을 버리고 새 대륙(大陸)을 찾아서 대양(大洋)을 건”너는 개척자적인 모습이고, 두 번째는 “조국도 잃어버리고 세상을 끝없이 방랑”하는 유랑민의 모습이다. 흑구라는 필명에는 당시로는 드물게 시카고의 노스파크대학(North Park College)과 필라델피아의 템플대학(Temple University)에서 각각 영문학과 신문학을 공부한 선구자의 자부심과 조국을 잃어버린 식민지인의 비애가 담겨 있는 것이다. 거기에 덧붙여 흑구의 흑에는 “외로운 색, 어느 색에도 물이 들지 않는 굳센 색, 죽어도 나라를 사랑하는 부표(符表)의 색이라는 생각에서 ‘흑(黑)’자를 택하기로 했다.”(나의 필명의 유래, ‘월간문학’, 1972.6)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변치 않는 애국심과 지조가 아로새겨져 있다.

 

포항시 남구 호미곶면에 건립된 흑구문학관의 전시물.
포항시 남구 호미곶면에 건립된 흑구문학관의 전시물.

해방 이전 한흑구는 필명 흑구가 조금도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산 열혈청년이었다. 한흑구의 삶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아버지 한승곤 목사를 빼놓을 수 없다. 기독교적 민족주의자인 한승곤은 미국에 간 지 3년만인 1919년에 흥사단 본부 의사장에 선임될 정도로 흥사단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한흑구도 미국에서 1930년 3월 흥사단에 입단하여 활동하였으며, 1934년 귀국한 이후에도 평양에서 동우회 활동을 이어갔다. (한흑구의 흥사단 활동에 대해서는 한명수의 ‘한흑구는 민족시인이다’(포항문학 46호, 2019)를 참고)

일제 시기 민족운동은 크게 무장투쟁론과 실력양성론으로 나눠볼 수 있다. 무장투쟁론을 대표하는 이는 단재 신채호이며, “부지깽이라도 들고 나가서 싸우자”는 명제로 요약되는 그의 사상은 의열단의 투쟁 선언문으로 작성한 ‘조선혁명선언’(1923)에 잘 나타나 있다. 실력양성론은 조선이 식민지가 된 이유를 실력의 부족에서 찾고, 독립을 위해서는 우선 다방면에 걸친 민족계몽이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이러한 실력양성론을 대표하는 이가 도산 안창호이며, 그의 사상을 실천하는 단체가 바로 흥사단이다. 한흑구가 도산의 사상에 연결되어 있음은 도산의 체포 소식을 듣고 지은 ‘잡혀간 님-도산 선생님께 드림’(新韓民報, 1932.10.6.)이라는 시에 잘 나타나 있다. “벌써 벌써 주고 간 님의 뜨거운 맘-아! 나를 어찌 떠나리이까?”라고 절규하는 이 시는 한흑구에게 도산이 거의 육친화 된 숭배의 대상이었음을 증명하기에 모자람이 없다. 1937년에는 아버지 한승곤 목사와 함께 흥사단의 후신인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검거되어 고통을 받는다. 이 때 일제는 도산 안창호를 비롯해 180여명을 검거하였으며, 도산 안창호는 이 사건으로 사망한다.

 

 

보 리

춥고 어두운 겨울이 오랜 것은 아니었다.
어느덧 남향 언덕 위에 누렇던 잔디가 파아란 속잎을 날리고, 들판마다
민들레가 웃음을 웃을 때면, 너, 보리는 논과 밭과 산등성이에까지, 이미 푸른
바다의 물결로써 온 누리를 뒤덮는다.

낮은 논에도, 높은 밭에도, 산등성이 위에도 보리다.
푸른 보리다. 푸른 봄이다.

아지랑이를 몰고 가는 봄바람과 함께 온 누리는 푸른 봄의 물결을 이고,
들에도 언덕 위에도, 산등성이 위에도, 봄의 춤이 벌어진다.
푸르른 생명의 춤, 새말간 봄의 춤이 흘러 넘친다.
이윽고 봄은 너의 얼굴에서, 또한 너의 춤 속에서 노래하고 또한 자라난다.

아침 이슬을 머금고, 너의 푸른 얼굴들이 새날과 함께 빛날 때에는,
노고지리들이 쌍쌍이 짝을 지어 너의 머리 위에서 봄의 노래를 자지러지게 불러
대고, 또한 너의 깊고 아늑한 품속에 깃을 들이고, 사랑의 보금자기를
틀어 놓는다.

수필 <보리> 중에서

 

흥사단 이념에 충실하여 민족독립운동에 매진하던 한흑구의 모습은 일제 시기 창작된 수필에 잘 나타나 있다. 수양동우회(흥사단과 같은 계열의 단체)의 기관지인 ‘동광’에 발표된 ‘젊은 시절(時節)’(1933)은 세상에 당차게 맞서고자 하는 젊은이의 의기로 가득하다. 이 글에서 한흑구는 젊은이의 신조로 “사어이상(死於理想)!”을 내세운다.

‘재미(在美) 6년간 추억 편편(片片)’(신인문학, 1936.3)은 제목처럼 미국에서 생활하며 경험한 여러 가지 일들을 기록한 수필이다. 여러 에피소드를 관통하는 정신은 이 시기 한흑구의 마음 속에 가득한 민족의식이다. 한흑구는 “영문으로 창작을 힘 쓰는 동안 조선문 창작이 퇴래(退來)할 것”을 걱정하면서 “영문 공부도 조선인적 태도”로서 할 것을 결심하기도 하고, “해외에 있을 때 조선인적 태도를 몰각하는 사람”을 강하게 비판하기도 한다. 특히 템플대학에 다닐 때 동양 학생 강연회에 조선 학생 연사로 나서, 5분간이나 연단에서 머리를 숙이고 침묵하는 장면에서는 나라 잃은 청년의 고뇌가 묵직하게 느껴진다.

이 시기 한흑구는 미국 흑인들의 삶과 문학에 주목하는데, 이는 같은 피억압 인종으로서의 동질감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재미(在美) 6년간 추억 편편(片片)’에는 방랑 중에 남부 흑인들이 사는 촌락을 지나며 “흑인종은 무엇하려 낳나? 목화송이나 따려 낳지!”라는 구슬픈 노래를 들으며 발을 멈추는 모습이 등장한다. 한흑구는 10여 편의 소설을 창작했는데, ‘황혼의 비가’(백광, 1937.5)는 텍사스의 목화 농장에서 여전히 노예와 같은 삶을 살아가는 흑인들의 아픔을 형상화한 작품이다. 또한 ‘미국 니그로 시인 연구’(동광, 1932.2) 등의 평론을 통해서 흑인문학을 한국에 소개하기도 하였다.

한흑구는 자신의 수필관이 담긴 ‘수필의 형식과 정신’(월간문학, 1971)에서 “수필은 하나의 산문시적인 정신으로써 창작되어야 할 것이며, 줄이면 한 편의 시가 되어야 할 것이다.”라고 할 정도로, 수필의 예술성을 중요시하였다. ‘봄의 초조(焦燥)’(백광, 1937)는 일제 시기 수필 중에서 한흑구의 민족 의식과 예술적 형상화가 아름답게 조화를 이룬 명작이다.

이 수필은 “봄이 오는 것이 반가운 한편 무섭다.”는 문장으로 시작된다. 반가운 것이 “생의 신비와 충동과 초조”라는 단어들로 표현되는 봄의 가공할 생명력이라면, 무서운 것은 보릿고개로 상징되는 춘궁(春窮)의 고통이다. “겨우내 찬밥도 못 먹고 끼니를 굶던 젊은 색시는 늙은 부모와 그 지아비와 옷 벗은 빨가숭이 어린애를 버리고 눈물과 한숨의 겨울을 원망하며 꽃 피는 봄을 찾아 걸어보지도 못한 산길을 더듬어 도망”가는 것이다. 도망간 젊은 색시가 향하는 곳은 한반도 너머의 저 먼 곳이다. 그것은 “이렇듯 춘궁(春窮)의 한숨은 두만강을 넘고 춘궁의 눈물은 압록강을 넘는다.”는 시적인 표현을 통해 드러난다. 심지어 생존의 고통에서 도망간 처녀는 “아지랑이 같이 엷은 처녀의 꿈은 도시의 항간(巷間)을 헤매고 혹은 버드나무 푸르게 서 있는 우물(井) 속에 잠겨 버린다.”라는 암시적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도시의 어둠 속을 헤매거나 죽음의 나락으로 떨어질 수도 있다. 동포의 삶과 현실에 누구보다 민감한 한흑구에게 봄은 낭만과 도취의 대상이 아닌 초조함을 가져오는 잔혹한 현실(‘봄의 초조’)인 것이다.

식민지 시기 한흑구는 참으로 단단한 정신과 해박한 지성으로 민족의 고단한 현실을 누구보다 깊이 있게 통찰한 수필을 남겼다. 그것은 한흑구의 본래 성품에서 비롯된 바도 있겠지만, 식민지라는 시대 상황이 서정보다는 지성을 긍정보다는 비판을 요구한 까닭이라고 할 수 있다. 시대의 아픔을 탁월한 수필로 승화시킨 한흑구는, 어두워져 가는 하늘 아래 고고하게 떠올라 날카롭게 지상을 응시한 한 마리 검은 갈매기였던 것이다.
 

작가 한흑구는

본명은 세광(世光). 1909년 평양에서 태어났다. 숭인상업학교와 보성전문학교에서 공부했고, 1929년 미국으로 건너가 영문학을 전공했다. 포항 수산초급대학 교수를 지냈고, 수필가, 번역문학가로 세상에 이름을 알렸다. 수필 ‘젊은 시절’ 시 ‘북미 대륙 방랑시편’을 썼고, ‘어떤 젊은 예술가’ 등의 소설도 집필했다. 1948년 포항으로 거처를 옮겨 활발한 창작 활동을 이어갔고, 담백한 문장으로 이름이 높았다.

/문학평론가 이경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