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욱 시인
김현욱 시인

책은 인간관계와 비슷하다. 어떤 책은 항상 가까이 두고 자주 보고 싶지만 또 어떤 책은 몇 장 넘기다 이내 멀리 던져둔다. 이사를 다녀도 꼭 챙기는 책이 있는가 하면 이때다 싶어 분리수거장으로 내다버리는 책도 있다. 첫사랑 같은 책이 있는가 하면 두고두고 꺼내 읽으며 위안을 받는 오랜 친구 같은 책도 있다. 내 돈 들여 사는 꼭 사야하는 책이 있고, 도서관에서 빌려 읽는 책이 있다. 모서리를 접거나 삼색 볼펜으로 정성스레 밑줄을 치는 책이 있는가 하면 잡지책처럼 설렁설렁 훑어보고 덮어버리는 책이 있다. 책과 인간은 참 많이 닮았다. 인간을 통해 다른 인간으로 나아가듯 책을 통해 다른 책으로 나아간다. 최근에 읽은 헬렌 니어링(1904∼1995)의 자서전 ‘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가 그러하다.

헬렌의 삶을 이해하려면 인도철학자 크리슈나무르티와 경제학자 스코트 니어링을 알아야 한다. 헬렌은 한때 크리슈나무르티의 연인이었다가 스물네 살에 스코트 니어링을 만나 평생을 함께 한다. 스코트는 헬렌보다 스물한 살이나 많았다. 1928년 스코트가 삶의 밑바닥까지 추락했을 때, 헬렌은 스코트의 든든한 반려자가 되어주었다. 두 사람은 1932년 버몬트 숲으로 들어가 농장을 일구며 단순하고 소박한 삶의 원칙을 지키며 스무 해를 살았다. 그 보석 같은 삶의 기록이 바로 ‘조화로운 삶’이다. 소로우의 ‘월든’(1854)과 함께 인간 문명의 위선과 인간다운 삶, 지속가능한 환경에 대해 묵직한 질문을 던지는 고전이다.

‘조화로운 삶’, ‘조화로운 삶의 지속’을 읽으며 꼿꼿한(?) 스코트 보다는 유연한 헬렌에게 더 큰 호감을 느꼈다. 헬렌이 없었다면 스코트는 백 살 생일 때 “스코트 니어링이 백 년 동안 살아서 이 세상은 더 좋은 곳이 되었다.”라는 마을 사람들의 축하를 받을 수 없었을 것이다. 백 살이 된 스코트 니어링은 스스로 음식을 끊고 죽음으로 삶을 완성했다. 스코트가 죽고 8년 뒤에 헬렌은 ‘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라는 책을 펴냈다. 헬렌의 삶은 ‘친절과 배려, 사랑’으로 압축할 수 있다. “45년의 연구와 공부 뒤에 얻은 다소 당혹스러운 결론으로, 내가 사람들에게 줄 수 있는 최상의 조언은 서로에게 조금 더 친절 하라는 것이다.”라는 올더스 헉슬리의 말에 헬렌은 전적으로 동의했다. 1983년 8월 24일 아침, 헬렌은 스코트의 마지막 순간을 함께 하며 아메리카 토착민의 노래를 조용히 읊조렸다고 한다. “나무처럼 높이 걸어라. 산처럼 강하게 살아라. 봄바람처럼 부드러워라. 네 심장에 여름날의 온기를 간직해라. 그러면 위대한 혼이 언제나 너와 함께 있으리라.” 스코트는 “좋…아. 하….”하며 마지막 숨을 내쉬었다고 한다.

마흔 중반을 겨우 넘기는 와중에 뒤늦게 스코트와 헬렌은 만났다. 잘못 살아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이 삶을 당장 어찌할 도리는 없다. 바꿀 수 있는 건 세상이 아니라 ‘자기 자신’뿐이라고 헬렌과 수많은 성자들이 말했다. 삶의 나침반을 ‘소박한 삶’으로 맞춰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