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희룡 서예가
강희룡 서예가

13세기에 남러시아에 성립한 몽골왕조를 금장한국(金帳汗國)이라 한다. 칭기즈칸의 손자인 바투는 몽골 서정군의 총수가 되어 러시아 및 동유럽과 남러시아를 장악해 킵차크한국의 기초를 구축했다. 1347년 무렵 이 킵차크 군대가 제노바 시를 향해 페스트 환자의 시신을 쏘아 보냄으로써 유럽에 페스트를 전파했다는 것이 일반적인 설이다. 그러나 이전부터 동방 원정에 나섰던 십자군 병사들이 보석과 동방 문화를 약탈해 오면서 부수입으로 나병과 흑사병을 얻어 왔다는 것 또한 정설이다.

그때부터 순식간에 퍼져나간 흑사병은 불과 수년 동안 이탈리아, 영국을 비롯하여 유럽 중부를 거쳐 3년여 만에 스칸디나비아 국가에까지 이르렀다. 기록에 따르면 당시 전 유럽인구의 1/3 내지 1/4이 사망했다고 기록된다. 숫자로는 약 2천500만에서 6천만명에 이르는 유럽인이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서유럽의 인구는 16세기가 되어서야 페스트 창궐 이전 수준을 회복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흑사병이 가져온 유럽인들의 공포와 사고의 변환을 잘 보여 주는 문학 작품이 있으니 바로 이탈리아의 작가 보카치오가 1348년에서 1353년까지 쓴 소설들을 묶은 단편 소설집 ‘데카메론’이다. ‘열흘간의 이야기’란 뜻의 이 작품에는 피렌체에 창궐한 흑사병을 피해 시골의 한적한 별장에 몸을 숨긴 청년 셋과 처녀 일곱 명이 열흘간에 걸쳐 차례로 이야기한 기록, 즉 100편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단테의 ‘신곡(神曲)’과 견주어 이 작품을 인곡(人曲)이라 할 만큼 근대소설의 선구자가 탄생된 것이다.

흑사병의 공포는 유럽사회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첫째로 예술이 후퇴한 것이다. 예술은 기계가 아닌 사람의 창의력에서 비롯되는 것인 만큼 예술가들이 사라지고 난 후 그 자리를 메우는 데 오랜 시간이 필요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창의력을 높이기 위해 예술가들이 선호하던 여행까지 금지가 되었으니 운이 좋아 살아남은 예술가들이 그릴 만한 것은 너무나 생생한 기록인 페스트가 남긴 공포뿐이었다.

다음으로 나타난 현상은 사회계층의 급격한 변동이었다. 수많은 노동자의 희생은 지주의 파산으로 이어졌고 노동력이 부족해지자 임금은 급격히 상승했다. 게다가 금은보화는 아무리 쥐벼룩이 공격해도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따라서 살아남은 사람들에게는 이전에 비해 훨씬 많은 재산이 할당되었다. 이 시대만큼 졸부(猝富)가 급격히 출현한 시대도 드물 것이다. 이 졸부들은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지식을 머리속에 채우기보다는 겉치레만 신경 쓰는 유행으로 인해 패션산업이 급격히 성장하게 된 것이다. 지금 중국 우한지방에서 발생된 신종역병으로 인해 전 세계가 비상이 걸렸다. 앞으로 어떻게 확산될지는 두고 봐야 알 일이지만, 정부는 중국 눈치 보며 강력한 대책에 미온적이다가는 ‘설마가 사람 죽인다’는 속담을 상기해야 될 것이다. 이탈리아 정부가 이 신종 코로나 감염자가 한 명 발생하자마자 700여 년 전의 기억을 더듬어 바로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한 것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