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도형 아시아퍼시픽해양문화연구원 이사
김도형 아시아퍼시픽해양문화연구원 이사

높아야만 산이 아니다. 수려해야만 산이 아니다. 도심에서 멀리 떨어져야만 산이 아니다. 낮은 산도 있고, 밋밋한 산도 있고, 도심 깊숙이 들어와 있는 산도 있다.

영남의 소금강(小金剛)이라 불리는 내연산, 금세라도 날개를 활짝 펼치고 하늘로 날아오를 듯한 비학산, 원효와 자장, 혜공 등 고승들의 재미난 옛이야기를 품고 있는 운제산, 그리고 동대산, 도음산, 천마산, 봉좌산, 형산 등 포항에는 크고 작은 산들이 은은히 펼쳐져 있다. 이 산들과 이어져 도심에는 수도산, 학산, 양학산 같은 낮은 산들이 나지막이 엎드려 있다. 도심의 낮은 산들은 도심 밖 높은 산들보다 사람들과 더 친숙하기 마련이다.

“사람들이 서로 미워서 잡아죽일 듯 / 이빨을 갈고 손톱을 세우다가도 / 칡넝쿨처럼 머루넝쿨처럼 감기고 어우러지는 / 사람사는 재미는 낮은 산만이 안다 / 사람이 다 크고 잘난 것만이 아니듯 / 다 외치며 우뚝 서 있는 것이 아니듯 / 산이라 해서 모두 크고 높은 것은 아니다 / 모두 흰 구름을 겨드랑이에 끼고 / 어깨로 바람 맞받아치며 사는 것은 아니다” - 신경림 ‘산에 대하여’중에서

포항사람들의 가장 친근한 벗은 수도산이다. 산이라 하기에 겸연쩍은, 마을 뒷동산 같은 곳이다. 수도산은 원도심인 중앙동과 덕수동을 비롯해 우창동, 용흥동 등에 두루두루 걸쳐져 있다. 원래 백산(白山)이라 불렀으나, 조선 세조의 왕위 찬탈에 항거한 모갈(茅葛)거사가 은둔하며 곡기를 끊고 순절한 후부터 모갈산이라 불렀다. 일제 강점기에 상수도를 시설할 때 배수지(配水池)를 이 산정에 설치한 연유로 수도산이라 했고, 해지는 서쪽에 있다 하여 서산이라 부르기도 한다.

수도산에는 수많은 추억이 무늬져 있다. 포항사람 치고 이 산에 추억 한 자락 묻어두지 않은 사람이 없다. 산책로가 되기도 하고, 운동장소가 되기고 하고, 백일장과 사생대회의 마당이 되기도 하고, 은밀한 사랑의 장소가 되기도 한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수도산 밑자락 철로에도 수많은 사람들의 애틋한 사연이 묻혀 있다.

이 산은 그런 까닭에 늙은 어머니의 가슴처럼 편안하고 아련하다. 왠지 마음이 허전한 날이면 이 산에 올라 멀리 호미곶에서부터 영일만, 제철공장, 동빈내항, 도심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영일만을 천천히 빠져나가는 배 한 척이 눈에 띄면 멀리 길 떠나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떠올리게 된다.

포항의 작가 손춘익의 대표작인 ‘어린 떠돌이’에서 서산 밑 가난한 동네에 사는 주인공도 무시로 수도산에 올라 영일만을 내려다본다.

“나는 그 옹달샘 곁에 오도카니 앉아 먼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가없이 넓은 바다에는 흰 돛단배가 서너 척 한가롭게 떠간다. 그러고 보니 그곳은 워낙 내 자리였다. 어느 날이고 틈만 나면 그곳에서 살다시피 했다. 기쁘면 기쁜 대로 또 슬프면 슬픈 대로 나는 으레 그곳을 찾아 하염없이 먼 바다를 바라보곤 했다. 한 마리 외로운 짐승처럼.”

작품 속 옹달샘은 서산, 곧 수도산에 있다. 그렇다. 수도산에 올라 영일만을 물끄러미, 하염없이 바라보는 것, 그것은 그 자체로 가장 포항다운 풍경의 하나이다.

지난 2013년 봄날의 큰 산불은 수도산에 깊은 생채기를 남겼다. 자연의 복원력 덕분에 산은 원래 모습을 되찾고 있지만 상처는 곳곳에 남아 있다. 굳이 산불 후유증을 떠나서라도 수도산은 방치돼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시민들의 추억과 그리움, 꿈이 아로새겨져 있는, 늙은 어머니 같은 저 키 낮은 산은 그렇게 상처를 안고도 말없이 도심을, 영일만을 내려다보고 있다. 이제 그 품속에서 자란 사람들이 저 산을 정성으로 보살펴야 할 때가 되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