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차르트의 초상.
모차르트의 초상.

 

세상에는 많은 음악들이 있고 그 음악 안에 함축된 내용은 사람마다 인격이 다르듯이 모두 다르다. 지금까지 음악을 벗으로 살아오면서 필자의 마음을 움직였던 작품과 그것을 작곡하였던 작곡가의 마음을 되짚어보고, 우리가 음악시간에 미처 배우지 못하였던 작곡가의 인생을 소개하며 글을 읽는 분들의 영혼이 쉴 수 있는 소중한 쉼터를 제공하고자 한다.

사람들이 주로 듣는 클래식 음악이 바로크시대부터라고 생각할 때 참으로 많은 작곡가들이 이 세상을 살다 갔다. 그 중 잊혀진 작곡가가 더 많겠지만 우리가 기억하는 작곡가들은 사람들이 공감할 만한 특별한 작품을 남겼거나 음악사적으로 획을 그을 만한 양식이나 기법을 새롭게 시도한 작곡가들일 것이다. 르네상스 시대와 바로크 시대의 경계에 위치한 클라우디오 몬테베르디(1567∼1643)를 시작으로 바로크시대의 마지막과 고전악파의 시작에 서 있는 요한 세바스찬 바흐(1685∼1750), 그리고 고전악파에서 로맨틱음악의 시대로 인도한 루드비히 판 베토벤(1770∼1827), 그리고 낭만음악에서 근·현대 음악으로 넘어가는 단초를 제공한 리하르트 바그너(1813∼1883) 등이 시대를 구분하는 획을 그은 작곡가로 우리는 기억한다.

하지만 세상에서 가장 많이 연주되는 작곡가는 이 중에 있지 않다. 필자가 오늘 말하고자 하는 작곡가는 모차르트(Wolfgang Amadeus Mozart)이다. 세계 어딘가에서는 반드시 모차르트 음악이 연주되고 있다고 한다. 모차르트는 시대를 구분 짓는 획기적인 양식을 남긴 작곡가는 아니었다. 과연 다른 작곡가들에 비해 어떤 점이 뛰어나서 36년의 짧은 생애에도 불구하고 전 인류에게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사랑받고 있는 것일까?

모차르트의 음악은 다른 작곡가들과 분명히 구분되는 점이 있다. 필자는 그것을‘순수함’이라고 생각한다. 모차르트는 오스트리아의 잘츠부르크에서 태어나서 당시 궁중 음악가였던 그의 아버지 레오폴트 모차르트(1719∼1787)에게서 이른바 조기 교육을 받았다. 그의 아버지는 궁중 음악가였으며 ‘기본 바이올린 교습법 시론’이라는 이후 오랫동안 사용된 표준교재를 집필할 정도로 음악교육에 관심이 많았다. 아들의 놀라운 재능을 감지하였던 그는 어린 모차르트를 데리고 유럽의 곳곳을 다니며 연주회를 개최하였으며 바로크가 탄생했던 이탈리아를 비롯해 오스트리아의 음악정서와는 달랐던 유럽의 다양한 도시를 누비며 연주여행을 하였다.

 

모차르트의 무덤,그의 시체는 아직도 행방을 모르며 무덤은 비어있다.
모차르트의 무덤,그의 시체는 아직도 행방을 모르며 무덤은 비어있다.

 

이 부분은 모차르트에게 글로벌한 음악을 쓸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제공하였다. 그의 고향인 잘츠부르크란 지역도 비록 규모는 작지만 동유럽과 서유럽의 문화가 자연스럽게 융화되어 발화되는 곳이었기에 모차르트는 선천적, 후천적으로 다양한 음악양식을 접할 기회를 가지게 되었고 그것이 그의 작품에 장점으로 반영되었다.

모차르트는 ‘음악의 신동’으로 불린다. 하지만 이 별명은 그에게는 다소 억울한 면이 있다. 이 별명은 그를 타고난 천재로만 각인시키며 모차르트에 대한 이미지를 고정시켜 버리는데 사실은 조금 달랐다.

모차르트는 유년기와 청소년 시기를 부모라기보다 매니저와 음악스승의 역할을 하였던 아버지와 연주 여행을 하며 보냈다. 이것은 어린 시절을 그의 또래 집단과 함께 아이답게 보내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마 건강상태도 좋지 않았을 것이며 자신의 음악을 들어주는 사람들이 주로 자신보단 계급이 높은 귀족 계급들이었기에 엄청난 격식과 예의범절을 강요받았을 것이니 스트레스도 많았을 것이다.

그의 어머니와도 일찍부터 헤어져 지내야 했으며 아들에게 모든 것을 쏟아 붓는 그의 아버지에게 투정을 부리기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음악이었으며 음악은 자신의 전부였을 것이다. 지난 2009년 우리 곁을 떠난 마이클 잭슨은 바보스러울 정도로 사람을 잘 믿었다고 한다. 그 이유가 그 또한 5살이란 어린 시절부터 그의 형제들과 ‘잭슨 파이브’라는 그룹을 이뤄 음악활동으로 보냈기에 보통 사람들처럼 평범하게 성장할 시간을 보내지 못했다. 모차르트의 어린 시절과 공통점이 많은 부분이다.

모차르트 대부분의 명곡은 그가 죽기 10년 전 빈에 정착한 후 대부분 작곡되었으며, 작곡의 기량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의 음악에서조차 순수함이 느껴진다. 여기서 순수함이란 어린 아이의 순수함을 말한다. 그 순수함에는 의도성이 없으며 음악을 듣는 이들에게 자신의 작품을 이렇게 들어달라는 요구도 없다. 오직 음악만이 존재하며 그것으로서 모든 것을 표현하고자 한다.

모차르트는 36년이란 짧은 생애에도 불구하고 참 많은 곡을 작곡하였다. 그의 가장 큰 유산은 22곡의 오페라 작품들이다. 그가 다작의 오페라 작품을 쓰면서 쌓인 많은 유산들이 어쩌면 가장 세속적인 음악장르인 오페라와 대조적으로 종교곡의 정수인 죽은 자를 위한 미사곡인 ‘레퀴엠’(K.626)으로 그의 마지막 작품답게 ‘신 앞에서 홀로 선 가련한 인간’이라는 가장 고귀한 드라마로 표현되었다. 이 곡을 구성하는 모든 곡들이 다 아름답지만 특히 라크리모사(Lacrimosa)가 가장 인상적이다. 영화 ‘아마데우스’의 마지막 장면에서 모차르트가 죽고 난 후 공동묘지의 한 구석에 볼품없이 매장될 때 나오던 배경음악이다.

모차르트가 세상을 떠난 해인 1791년 가장 유명한 오페라 ‘마술피리’와 ‘클라리넷 협주곡’‘피아노 협주곡 27번’을 비롯하여 많은 곡을 남겼다. 그리고 이 ‘레퀴엠’은 건강상의 이유로 모두 완성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일설에 의하면 라크리모사의 8마디까지만 모차르트에 의해 직접 작곡되어지고 나머지 부분은 그의 제자인 쥐스 마이어(1766∼1803)에 의해 완성되었다고 한다. 이탈리아의 오페라 작곡가 푸치니(1858∼1924)도 그의 마지막 오페라 ‘투란도트’를 모두 완성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지휘자 토스카니니(1867∼1957)는 1926년에 행해졌던 라 스칼라좌에서의 ‘투란도트’ 공연에서 3막이 연주되던 도중 “마에스트로가 쓴 곳은 여기까지입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지휘봉을 남겨두고 무대를 내려와 다른 지휘자가 지휘하여 연주를 끝냈다고 한다. 푸치니를 존경했던 토스카니니가 슬픔으로 지휘를 더 이상 할 수 없어서인지, 정확한 이유는 알 수가 없다.

모차르트의 ‘레퀴엠’은 자신의 죽음을 추모하여 작곡한 것은 아니었다. 발자크 백작이 먼저 떠난 자신의 부인을 추모하기 위해 의뢰한 곡이었지만 이 곡을 쓰며 모차르트는 쇠약해진 자신을 보며 죽음을 예감한 것으로 확신한다. 모차르트는 죽기 전 자신의 제자인 프란츠 쥐스 마이어(1766∼1803)를 불러 곡의 자신이 생각한 악상의 흐름을 지시해 두었다고 한다. 세상을 떠난 자가 시작하고 그를 추모하는 남은 자가 완성한 전무후무한 ‘레퀴엠’이 완성되었으며 산자와 죽은 자의 공동 작품이 되었다.

필자는 아직 죽음을 생각할 만한 나이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평소 주위 사람들에게 내가 좋아하는 곡을 늘 일러둔다. 그리고 혹시 내가 먼저 세상을 떠난다면 그 곡을 같이 듣거나 연주하면서 나를 추모해 달라고 농담 아닌 농담으로 이야기 하곤 한다.

 

칼뵘이 지휘한 모차르트 ‘레퀴엠’ 음반.
칼뵘이 지휘한 모차르트 ‘레퀴엠’ 음반.

 

모차르트가 가장 힘들어 했던 시기는 빈에 체재할 때부터였다. 빈 체재 초기에는 많은 사랑을 받았으나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Le Nozze di Figaro)’ ‘돈 지오반니(Don Giovanni)’등 그가 귀족들의 생활을 희화한 작품에 의해 결국에는 그를 지원해 주던 귀족들조차 모두 등을 돌렸다. ‘돈 지오반니’의 2막의 마지막 부분의 “돈지오반니∼ 그대가 초대하여 이렇게 왔도다!” 라고 노래하는 석상의 장면에서 모차르트가 자신에게 등을 돌린 귀족들에게 외치는 분노를 느낄 수 있다. 그리고 불꽃이 돈 지오반니를 지옥으로 내치는 장면에서 신에게 정의롭지 못한 그들의 심판을 요청하는 듯하다.

하지만 역시 그가 죽던 해 작곡된 짧지만 너무나 아름다운 모테트 합창곡 ‘아베 베룸 코르푸스(Ave Verum Corpus K.618)’는 한때는 환호하던 그들이 등을 돌려 결국은 자신을 비참히 죽게 만들었지만 그들을 용서해 달라는 속죄의 메시지와 그의 외롭고 고달팠던 인생이 느껴진다.

모차르트는 자신이 천재라고 불리는 것을 결코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가 남긴 유명한 말이 많지만 그를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말로 이 글을 마무리하려 한다. “사람들은 나의 음악이 쉽게 만들어졌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누구도 나만큼 작곡하는데 시간을 보내고 작곡에 대해 생각해 보지 못했을 것이다. 내가 지금까지 거듭 연구해 보지 않았던 음악의 거장은 없었다.”

 

 

문양일씨는 1971년 대구생이며 계명대 작곡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오케스트라 지휘를 공부했다. 현재 포항예술고에서 음악과 전임으로 재직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