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덕의 재발견

▲ 영덕의 어르신들이 풍선아트 수업을 즐기며 환하게 웃고 있다.
▲ 영덕의 어르신들이 풍선아트 수업을 즐기며 환하게 웃고 있다.

굳이 수백 년 전 선현들의 말을 새삼 인용하지 않더라도 많은 사람들이 이미 알고 있다.

“세상의 지식을 배우고 익히는 행위는 삶을 풍요롭게 한다”는 것을.

‘세상의 지식’을 배우고 익히기 위해선 가장 먼저 ‘글’을 읽고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이른바 문해(文解)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나라엔 한글을 읽고 쓸 수 없는 이들이 분명 존재한다.

그들에게 세상은 얼마만한 어두움과 답답함의 공간일까? ‘문해’가 가능한 사람들은 상상하기조차 어렵다.

30년 전쯤으로 기억된다.

부산의 버스 정류장에서 만난 80대 할머니 한 분이 잊히질 않는다.

“해운대로 가는 100번 버스가 오면 좀 알려 달라”는 부탁을 주위 사람들에게 하고 있었다.

바로 눈앞에 ‘해운대’ ‘100’이라 쓰인 버스가 와도 그걸 읽을 수 없는 심정, 평생을 문맹(文盲)으로 살아야 했던 그분의 고통을 누가 제대로 이해할 수 있었을까.

전국의 지방자치단체가 어려운 시절 학교를 제대로 다니지 못한 노인들을 대상으로 추진해온 ‘한글 교육’은 드물지 않게 감동적인 장면을 연출하곤 한다.

일흔 살 혹은, 여든 살이 되도록 읽고 쓰지 못했던 할머니들이 6개월~1년 남짓 한글을 배워 서툴게 쓴 짤막한 시와 수필이 젊은이들의 눈시울을 뜨겁게 만드는 것.

영덕 역시 지난 2015년부터 ‘성인 문해 교실’을 열어 한글 수업과 미술 수업을 진행하고 있다.

오보리, 영해 사진1리, 덕곡3리에서 시작된 ‘문해 교실’은 이듬해 영덕읍 생활문화교육센터에서 진행되는 합동 교육으로 이어졌고, 현재까지 50명이 넘는 사람들이 ‘글을 모르고 살았던 평생의 한’을 풀었다.

이와 관련 영덕군청 자치행정과 교육지원 담당자는 “해마다 ‘문해 교실’ 수강생이 증가하고 있고, 교육생들의 만족도 또한 어떤 사업보다 높다”고 설명했다.

▲ ‘글공부 마음공부’라는 시화로 많은 이들을 감동시킨 유필순 할머니와 할머니가 쓰고 그린 시화.
▲ ‘글공부 마음공부’라는 시화로 많은 이들을 감동시킨 유필순 할머니와 할머니가 쓰고 그린 시화.

글공부는 마음공부

글을 많이 배우고 싶다
남한테 안 빠지게 살고 싶다
허리도 아프고 다리도 아파서
굽은 허리 유모차에 기대서
열 걸음 걷다가 쉬고
열 걸음 걷다가 쉬면서
글 배우러 온다
글 배워서 맘이라도 편하구로.
 

◇ 심금 울린 아흔두 살 유필순 할머니의 시

영덕군 ‘문해 교실’이 해를 거듭할수록 코끝이 찡해지는 장면도 많아지고 있다.

늦게 시작한 할머니들의 공부 열기로 강의실이 뜨거웠던 지난 2017년.

6개월의 교육 일정을 마친 수강생 15명이 수료증을 받았다.

수강생 중 가장 나이가 많았던 아흔두 살 유필순 할머니는 직접 쓰고 그린 시화 한 점을 사람들 앞에 내놓았다. 아래와 같은 글이었다.

매끄럽고 유려한 문장은 아니지만, 유 할머니의 진심이 담긴 이 작품은 영덕문화예술제 작품관에 걸려 방문자들의 심금을 울렸다. 손수건을 꺼내 드는 이들도 있었다고 한다.

공자는 ‘논어(論語)’ 학이편(學而篇)에서 “교언영색 선의인(巧言令色 鮮矣仁)”이라고 일갈했다.

“감언이설과 꾸민 얼굴로는 어진 덕을 이루지 못한다”는 뜻이다. 유필순 할머니의 글에서는 감언이설도, 꾸민 얼굴도 발견할 수 없다. 그 솔직함이 사람들 가슴 깊숙한 곳에 자리한 감정을 자극했던 게 아닐까?

이날 문해 교육을 마친 15명 할머니들은 “이젠 나도 이름 석 자를 쓸 수 있다. 서툴지만 간판과 이정표도 읽을 수 있어 혼자 힘으로 어디든 찾아갈 자신감도 생겼다. 손자들 보기에도 부끄럽지 않다. 앞으로도 더 열심히 배우고 싶다”고 입을 모았다. 주름진 얼굴에서 환하게 피어난 웃음꽃이 보기 좋았다.

▲ 영해 행복학습센터에서 즐거운 시간을 가지고 있는 영덕 군민들.
▲ 영해 행복학습센터에서 즐거운 시간을 가지고 있는 영덕 군민들.

◇ 배움에 끝이 없어 ‘100세 시대 맞춤교육’으로

올해 역시 영덕군의 ‘문해 교실’은 수강생과 강사들이 함께 기뻐할 경사를 맞았다. 어려서 못 배운 서러움과 뒤늦은 배움을 통해 찾은 즐거움이 행간마다 담긴 할머니들의 시화 작품이 경상북도를 넘어 전국 단위에서도 좋은 평가를 받은 것.

영덕의 이순애(80) 할머니는 ‘엄마의 세월’이라 이름 붙인 시화로 지난 12일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전국 성인 문해 교육 시화전’에서 우수상을 받았다.

이에 앞서 9월 초순엔 경북도청 동락관에서 개최된 ‘2018년 경상북도 문해 대잔치’ 시화전 부문에서 김일리(82) 할머니가 입선하기도 했다.

‘경상북도 문해 대잔치’는 유네스코가 지정한 ‘국제 문해의 날’(매년 9월 8일)을 기념해 문해 교실 수강생들이 이룬 성과를 공유하고, 이들의 학습 의욕을 높이기 위해 마련된 행사였다.

영덕군청 자치행정과 관계자는 “경북 문해 대잔치엔 우리 군 수강생 30명도 참석했다. 이분들의 늦깎이 열정이 풍성한 결실을 맺은 것이기에 어르신들의 얼굴에선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고 행사 당일의 분위기를 생생하게 전했다.

‘100세 시대’라는 말이 별다른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지는 시대다. 사람의 배움에는 끝이 없고, 공부를 향한 열정은 나이와 무관한 것이 아닐까.

영덕군은 내년에도 ‘문해 교실’을 지속적으로 운영할 것이라고 밝혔다. “많은 분들이 한글을 배우고 익혀 불편함 없이 생활할 수 있도록 돕는 동시에, 다양한 평생학습 프로그램 개발에도 노력을 아끼지 않겠다”는 약속이 믿음직스럽게 보인다.
 

▲ ‘2018년 경북 문해 대잔치’가 열리고 있다.
▲ ‘2018년 경북 문해 대잔치’가 열리고 있다.

노래 부르고 체조하고… ‘행복’ 나누는 행복학습터

“우리 지역에 사는 주민 모두가 언제든지 교육받을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해 지원함으로써 평생교육을 통한 지역 발전과 주민들 삶의 질 향상을 도모하겠다”는 목표 아래 추진됐던 영덕군의 ‘행복학습센터 운영사업’이 가시적 성과를 드러내고 있다.

지난 2015년 시작된 이 사업은 영덕군 마을평생교육지도자협의회가 웃음치료, 스마트폰 사용, 짚풀공예 등의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형태로 진행됐다.

‘찾아가는 평생학습’으로 소규모 마을 주민들에게 의미 있고 유익한 배움의 기회를 제공하고자 기획된 것이다.

▲ 자신의 시화 작품 ‘엄마의 세월’ 앞에 선 이순애 할머니.
▲ 자신의 시화 작품 ‘엄마의 세월’ 앞에 선 이순애 할머니.

이 사업은 이듬해 ‘찾아가는 마을행복학교’의 치매 예방교육과 음악수업, ‘일자리 창출 프로그램’의 세라믹 핸드 페인팅과 아로마 손 마사지 등으로 확대됐다. 수강 인원도 해마다 늘고 있는 추세다.

영덕군 관계자는 “마을평생교육지도자들의 적극적인 재능 기부에 참여 주민들의 흥미와 관심도가 높아 마을공동체 활성화에도 도움을 주고 있다”고 사업을 평가하며 “행복학습센터가 영덕 주민들의 쉼터이자 문화 향유공간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는 방법을 고심하고 있다”고 부연했다.

이를 증명하듯 ‘도비 보조사업’으로 2015년부터 3년간 진행하기로 예정됐던 ‘영해 행복학습센터’의 프로그램은 주민들의 호응에 힘입어 올해는 군비 사업으로 시행되고 있다.

또한 내년에도 계속될 예정이라는 게 영덕군청의 설명이다.

영해 행복학습센터의 평생교육 과정 중 인기 프로그램은 ‘도자기 페인팅’과 ‘풍선아트’, ‘노래교실’과 ‘민요체조’ 등이었다.

올 초여름엔 영덕군 강구 행복학습센터 평생교육 과정 개강식이 열려 인근 주민들의 기대감을 더했다. 오는 10월 말까지 매주 수요일과 목요일 에코백 만들기, 모듬북, 퍼즐게임, 전통 탈 만들기 등의 프로그램이 운영된다.

▲ 행복학습센터 인기 프로그램 중 하나인 짚풀공예 수업.
▲ 행복학습센터 인기 프로그램 중 하나인 짚풀공예 수업.

강구군의 행복학습센터 운영사업은 도비 지원 공모사업에 영덕군이 선정됨으로써 그 출발을 알리게 됐다.

행복학습센터의 프로그램을 기획·진행하는 건 마을평생교육지도자들이다.

경상북도는 이들을 ‘지역공동체를 기반으로 하는 풀뿌리 평생교육의 활성화’를 위해 8년 전부터 적극적으로 양성해 왔다. 현재 영덕군에서도 40여 명이 활동 중이다.

영덕군 마을평생교육지도자협의회 지만수 회장은 “우리 군에 거주하는 어르신들이 배움의 즐거움을 만끽하며,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도록 작은 힘이나마 보탤 것”이라는 말로 회원들의 단단한 각오를 전했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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