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규종경북대 교수·노문학
▲ 김규종 경북대 교수·노문학

2018년 7월 하순, 한반도에서 두 사람이 세상과 작별한다. 최인훈과 노회찬이 그들이다. 최인훈은 1936년생, 노회찬은 1956년생으로 두 사람은 스무 살 터울이다. 소설가는 인간의 영혼과 시공간, 영원성과 불멸을 다룬다. 정치가는 인간의 물질과 현세성과 필멸을 본업으로 삼는다. 우주의 미소(微小)한 존재로 스스로를 자각하는 인간을 천착하는 소설가와 지금과 여기의 포로로 회자정리(會者定離)의 필연을 천형(天刑)처럼 안고 가야하는 정치가. 한증막을 연상시키는 폭염의 거리와 광장에서 시민들은 두 사람을 전송한다. 하나의 시대를 열었던 소설가와 다른 시대를 열고자 몸부림쳤던 정치가를 추모하는 것이다. 그들은 모두가 함께 하는 열린 공간과 이데올로기와 사회·정치·경제적인 평등을 추구했다. 화이부동(和而不同)의 대동(大同)의 마당을 열어젖히고자 했던 두 사람. 그들이 영원히 우리 곁을 떠났다. 그럼에도 그들이 남긴 자취는 언제나 우리와 더불어 잊히지 않을 것이다.

“개인의 밀실과 광장이 맞뚫렸던 시절에 사람은 속은 편했다. 밀실과 광장이 갈라지던 날부터 괴로움이 비롯했다. 그 속에 목숨을 묻고 싶은 광장을 끝내 찾지 못할 때,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광장’)

개인의 은밀한 공간과 대중의 광장이 맞뚫려있던 때, 사람은 누구나 안온하고 넉넉했다. 돈과 권력과 명예와 물질이 나와 당신을 구분하지 않았던 시절. 개인과 사회의 욕망이 민낯으로 대면하고 충돌하면서도 조화를 찾아나갔던 시간대. 최소한의 체면치레와 인간다움에 대한 믿음과 실천이 일상화되었던 시대. 딸깍발이와 수도승과 행운유수 하는 처사들과 논객들과 장삼이사의 지근거리(至近距離)가 당연시됐던 사멸한 과거. 어느 때부턴가 밀실은 광장과 차폐(遮蔽)돼 광장과 밀실이 유리되기 시작한다. 밀실의 개인은 광장의 대중이되, 개인의 밀실과 대중의 광장은 더 이상 교통하지 못한다. 나의 밀실과 너의 밀실은 개별적으로 존재하며, 상호이해와 소통 가능성은 원천적으로 차단된다. 그런 연유로 열려 있어야 할 광장은 죽어버린 밀실들의 조합으로 생명을 상실한 채 떠도는 무색무취(無色無臭)한 사멸의 거대공간으로 전화된다. 밀실에서는 부패 무능 타락 패거리주의로 무장한 개인들이 혈연과 지연과 학연과 금전으로 뒤얽혀 악취를 뿜어낸다. 그들이 만들어낸 광장은 전제(專制)와 독재와 학살을 은폐하는 강제와 억압의 공간으로 탈바꿈한다. 광장은 그리하여 밀실의 확대 재생산을 되풀이하면서 개인의 숨통을 조이고, 대중의 반역을 조준한다. 죽어버린 대중과 사라져버린 밀실이 야기하는 시공간에 저항의 손길을 보낸 이들이 최인훈과 노회찬이다.

1960년대 4·19 혁명의 시공간에서 태어난 ‘광장’에서 최인훈은 집단적 폐쇄성과 강제성으로 인해 광장만이 동그마니 남은 북한체제를 거부한다. 그는 사회·경제적 불평등으로 인해 밀실만 횡행하고 광장이 사라진 남한체제도 부정한다. 그가 창조해낸 이명준은 오도 가도 못한 채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제3지대의 선택 가능성을 최인훈은 거부한 것이다. 우리는 그가 추구한 제3의 종점을 아직 알지 못한다,

1970∼80년대 노동운동으로 세상과 만난 노회찬은 평생 그 길을 걷는다. ‘자본과 임노동(賃勞動)의 화합할 수 없는 대립관계’에서 불거진 노동자의 정치·경제적인 지위향상을 위해 불철주야(不撤晝夜) 분투한다. 언제나 가난했지만 그는 웃음과 촌철살인(寸鐵殺人)과 정의로움과 미래기획을 잊지 않는다. 밀실에서 스러지는 노동자 개인이 아니라, 햇살 가득한 광장의 해방된 노동대중으로 거듭 나도록 온몸으로 싸워나간 불세출(不世出)의 투사 노회찬. 이제 그들은 우리 곁에 없다. 그들은 갔지만, 우리는 아직 그이들을 보낼 수 없다. 언젠가 광장이 밀실이 되고, 밀실이 광장과 만나는 그날이 오면 그들과 덩실덩실 어깨춤을 추고 싶다. 그날은 반드시 오리라! 그날 우리는 하나 되어 광장에서 찬란한 해방의 춤을 추리라!

이 칼럼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