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규종<BR>경북대 교수·노문학
▲ 김규종 경북대 교수·노문학

러시아 문학에서 신성불가침으로 수용되는 두 사람이 있다. 계관시인 푸쉬킨과 문학평론가 벨린스키다. 10월 혁명 이후에도 이들은 19세기의 권위를 온전하게 향수(享受)한다. 그런데 벨린스키는 별스럽게 두 가지를 싫어했다. 보드빌과 몰리에르. 양자의 공통점은 웃음과 희극이다. 니콜라이 전제(專制)와 대적(對敵)한 벨린스키였으니 그럴 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경산 아파트에 살다가 청도로 이사한 이유 중 하나는 층간소음이다. 범어동에서도 층간소음으로 시달렸다. 시도 때도 없이 들려오는 청소기 소리와 발걸음 소리가 불쾌와 불안과 불면을 야기(惹起)했다. 몇 차례 올라가 이야기했으나 “내 집에서 내 발로 다니고, 청소하는데, 당신이 무슨 상관이냐?” 하는 짜증섞인 대답이 돌아왔다.

경산에서는 떡을 해서 윗집을 찾아갔다. 이사왔다는 말과 함께 조용히 살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했다. 그러나 나의 기대는 이내 허망하게 끝나고 말았다. 주말이면 밤낮 가리지 않고 아이들 뛰어다니는 소리가 천장을 부술듯 울려댔다. 참다못해 올라간 내게 아이 엄마는 정색하며 말하는 것이었다. “애들이 다 그렇지, 별 걸 가지고 다 올라오시네!”

한국의 어린애들이 아파트 거실에서 공을 차며 자란다는 말을 나는 듣지 못했다. 어린 시절부터 두 아들의 발걸음을 단속하면서 소음을 경계했던 나는 그런 일반화를 처음 들었다. 어찌됐든 소음은 지속(持續)됐고, 나는 그녀에게 미안하다는 소리를 들어본 일이 없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난 법’이라 했던가?! 나의 농촌 이주는 그렇게 촉발됐다.

아침 일찍 태양이 얼굴을 내밀고, 저녁 늦게까지 석양의 그림자가 어둠과 맞서면서 농촌의 시간은 유장하게 흘러간다. 자연의 소리와 소와 닭 우는 소리 아니면 연중 사위(四圍)는 적막하다. 고요에 익숙해진 탓인지 도회지 소음은 임계점까지 온듯하다. 휴대전화로 통화내용을 행인들에게 시시콜콜 알려주는 청춘남녀부터 노년에 이르는 인간군상. 목소리라도 청아하다면 모를까, 까막까치 능가하는 째지는 소리로 주변을 소음으로 가득 채우는 무리. 여기저기 계단을 오르내리는 슬리퍼와 하이힐과 샌들의 공격적인 딸가닥 소리. 삼삼오오 짝지어 걸어가는 사람들의 박장대소와 가가대소(呵呵大笑)!

6월 13일 지방선거를 앞둔 요즘엔 트럭을 동원한 도우미와 자원 봉사자들의 목청이 대기(大氣)를 찢어버린다. 듣는 사람 하나 없건만 그들은 안하무인(眼下無人)이다. 해도 해도 너무한다는 생각이다. 선거 벽보 붙이고, 공보자료로 정당과 후보자의 주장을 알리면 충분하지 않은가?!

베를린이나 쾰른에서 대규모 유세차량을 동원해가며 선거운동 하는 것을 본 적 없다. 국영 텔레비전을 포함한 방송과 신문 매체가 평소에 정당의 주장과 활동상황을 꼼꼼하게 점검하고 통지한다. 시민 유권자는 그런 자료를 통해 지지 후보와 정당을 결정한다.

6월 12일이면 거리와 광장과 주택가를 소음과 불면으로 채운 소음이 사라질 것이다. 하지만 그때까지 무고한 유권자들은 참아야 한다. 듣고 싶지 않고 보고 싶지 않은 숱한 말과 공약(公約)과 후보자들과 그들의 행장(行狀)을 선전하는 도우미들의 소음을 참고 또 참아야 한다. ‘적폐청산’이라는 말이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시절이다. 선거철이면 넘쳐나는 소음과 공약(空約)과 트럭이야말로 적폐 아닌가. 이런 적폐 역시 우리가 청산해야 할 과제는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