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민호의 살며생각하며 ⑮

새것은 늘 환영받지만 오래된 것, 사라져 가는 것은 그리움의 대상이 된다. 청계천 동묘 앞 벼룩시장은 날이 갈수록 넓어지고 호황을 누린다. 경제가 바닥에서 좀처럼 나아질 줄 모르기 때문일 것이다. 있는 사람들은 무슨 말이냐 하겠지만 위에서 나아진 것이 아래로는 좀처럼 내려올 줄 모른다. 이것이 요즘 경제의 이상한 재흥이다.

몇 년 전 그 청계천에서 ‘컬럼비아 포터블 플레이어’라는 것을 산 적이 있다. 컬럼비아 사에서 만든 LP판 듣는 기기다. 그때 얼마 주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휴대용처럼 간편하게 생겼는데 가격이 꽤 높았다. 내 커다란 흠 가운데 하나는 오래된 것에 대한 애착을 버리지 못한다는 것. 결국 샀다. 십여 만원 했던 것 같다.

아주 오랜만에 이걸 듣고 싶어졌다. 가지고 있는 엘피판이라야 남들 다 갖고 있는 김광석 것, 그리고 들국화 것. 110볼트 전용이기 때문에 변압기를 찾아 연결하고 엘피판을 올리니, 소리가 정말 나온다. 가짜를 산 것 아니었으니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그런데 무슨 일이든 겹쳐서 오는 법인지, 이날 바로 엘피 판 전시해 놓은 곳에 가게 됐다.

행선지는 대전. 카페는 ‘비돌’이라는 신기한 이름을 가진 곳. 전시된 엘피 판은 강해진이라는 바이올리니스트가 만든 엘피판 일곱 장. 강해진은 즉흥 연주에 강한 연주자로 나는 그를 몇 주 전에 영화 관계로 만났다. 내 졸작 어떤 것을 영화로 만드는데 음악을 그에게 부탁했다는 것이었다.

비돌 윗층에서는 이 엘피판을 전시하고 아래층에서는 연주회를 열었다. 무슨 일이든 늦기 잘하는 내가 이날은 한 시간이나 일찍 가서 둘러본다. 엘피판 하면 헌책방 앞에 먼지를 잔뜩 뒤집어쓴 고물이나 7080 카페에 빼곡히 꽂아놓은 장식물들을 생각하기 쉬운데, 새로 만든 엘피판이다.

일주일에 한 번씩 몇 주 동안 일요일마다 대전에서는 비돌에서 연주회를 갖는다고 들은 게 몇 주 전이었다. 부산에서 시작해서 대전 지나 얼마 후에는 서울에서도 연다고 했다. 혼자만 바이올린 연주를 하는 게 아니고 함께 작업한 사람들이 나오기도 하고 초대 가수 같은 사람들도 나온다는 것인데. 이날의 출연자는 그룹 ‘허클베리핀’. 그들과 강해진 바이올리니스트는 아주 오래 전에 작업을 같이 한 적 있다고 한다.

허클베리핀 하면 한국의 대표적인 인디 록밴드 가운데 하나다. 비돌 1층은 비좁고 그들이 ‘뛰놀기’에는 확실히 작다. 그러나 바로 그래서 연주와 노래가 꽉 차 오른다. 허클베리핀의 대표작 ‘사막’은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그러고는 강해진의 작품을 그들이 함께 연주하는 것으로 무대는 막을 내렸다.

연주회가 끝나고 나오자 밤이 깊다. 은행나무는 봄에도 잎이 아름다움을 밤 조명 속에서 느낀다. 록밴드와 바이올린과 엘피 판. 오랜만에 다른 세상을 만난 것이 좋다. 세상은 험해도 음악은, 예술은 아름답다.

/방민호<서울대 국문과 교수>

/삽화 = 이철진<한국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