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빛 속을 걷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 지음·민음사 펴냄
인문·8천800원

시인이자 산문가였던 헨리 데이비드 소로(1817∼1862)가 걷기와 산책, 여행을 주제로 집필한 다섯 편의 에세이를 엮은 ‘달빛 속을 걷다’(민음사)가 출간됐다.

1817년 매사추세츠주 콩코드에서 태어나 교직 생활을 거쳐 탐욕스러운 자본주의와 물질문명에 대항해 자발적 아웃사이더로서 억압적인 국가 체제와 배금주의를 초월하고자 했던 ‘진정한 자유인’ 소로가 남긴 이 다섯 편의 에세이에는 이제껏 ‘월든’의 저자로만 알려졌던 그의 다채로운 면모와 웅숭깊은 사유가 가득 담겨 있다.

소로는 평생의 친구이자 초월주의를 함께 주도했던 랠프 왈도 에머슨과 동일한 이상을 공유했으나 그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갖위대한 실험’을 몸소 실천하는 행동가로서 큰 족적을 남겼다. 2년 2개월 2일 동안 월든 호숫가에 머물며 완전한 자유와 자족적인 생활을 직접 성취해 보인 ‘월든’을 비롯해 부당한 국가 권력에 저항해 투옥까지 불사하며 써 내려간 ‘시민 불복종’, 세속적인 부와 덧없는 명예를 경계하며 살아온 자신의 인생을 솔직하게 반추한 ‘원칙 없는 삶’에 이르기까지 소로의 사상과 작품은 그의 삶과 경험에서 떼려야 뗄 수 없다. 마찬가지로 ‘달빛 속을 걷다’에 수록된 다섯 편의 작품들도 소로의 섬세한 관찰, 투철한 탐구, 거침없는 모험심을 그대로 반영한다. 시시각각 변화하는 대자연과 매번 아름다운 풍경과 사색의 계기를 제공해 주는 계절의 변천, 신의 지문이 깃들어 있는 동식물의 경이로운 생태, 그 모든 것에서 취할 수 있는 감동과 깨달음을, 소로는 생생하고 수려한 문장으로 전해준다. 더불어 사회 혁명과 의식 전환이 횃불과 유혈로만 가능한 한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늘 마주하는 자연을 세심히 관찰하고, 심지어 별다른 생각 없이 나선 산책을 통해서도 충분히 이뤄질 수 있음을 매우 설득력 있게 이야기해 준다.

‘달빛 속을 걷다’에는 표제작을 필두로‘걷기’, ‘가을의 색’, ‘겨울 산책’, ‘하일랜드 등대로’가 차례로 수록돼 있다.

먼저,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낮의 세계’와 대비를 이루는 명상적이고 정신적인 ‘밤의 세계’를 다룬 ‘달빛 속을 걷다’에는 한평생 소로가 탐구했던 대자연의 위대한 잠재성, 그것을 발견해 내야만 하는 당위성이 시적인 문체로 담겨 있다. 소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규격화된 삶을 대변하는 낮만을 찬양하며 밤의 어둠과 모호성을 두려워하고 멸시하지만, 실상 밤이야말로 우리 정신의 심오한 영역과 맞닿아 있을 뿐 아니라 그것의 잠재력까지 일깨워 준다고 설파한다.

이어지는 ‘걷기’에서는 소로의 강도 높은 문명 비판을 시작으로 속되고 천박한 세태에 대한 저항이자 실천으로서의 ‘걷기’가 다채로운 예와 함께 다뤄진다. 소로는 진정한 ‘걷기’, 즉 자연과의 참된 ‘교감’이 사라져 가는 시대에 스스로 십자군이 돼 맞서 싸우겠다고(“걷는 동안 우리는 성지를 지키는 십자군이 된다.”) 의연히 다짐한다. 그가 생각하기에 ‘걷기’는 우리가 물질 너머의 세계를 내다볼 수 있는 가장 원초적이고 간단하며 중요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 헨리 데이비드 소로
▲ 헨리 데이비드 소로

‘가을의 색’과 ‘겨울 산책’에서는 각기 다른 계절의 정경이 병풍처럼 세밀한 묘사를 통해 선명하게 드러난다. 소로는 ‘가을의 색’에서 미국의 가을을 수놓은 다종다양한 초목들을 들여다보며 신세계(미국)의 가능성을 전망하고, 무용한 것의 유용함을 역설하며 한낱 미물에게도 저마다 생명력과 인간이 숙고해 볼 만한 진귀한 가르침이 있음(“가장 보잘것없는 식물이라도 충실하게 관찰하면 머지않아 독특한 가을의 색을 띨 것이다.”)을 알려 준다. 그리고 ‘겨울 산책’에서는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듯 겨울은 ‘죽음과 침묵의 계절’(“달력에 겨울은 바람과 진눈깨비를 맞으면서 외투를 여미는 노인으로 그려져 있지만, 겨울은 명랑한 벌목꾼이나 혈기 왕성한 젊은이처럼 보인다.”)이 아니라 주장하며 얼어붙은 대지 아래 엄연히 존재하는 생명의 강렬한 약동을 하나하나 지적해 보여 준다. 그런 한편 소로는 엄혹한 계절이기도 한 겨울을 관조하며 자연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려 하는 바를 열심히 새겨들어야 한다고 조언한다. 끝으로 조금은 이색적인 ‘하일랜드 등대로’에선 소로가 지닌 ‘자연 과학자’로서의 면모가 유감없이 드러날 뿐만 아니라, 험난하고 녹록하지 않은 바닷가 환경에 겨우겨우 적응해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같은 해안을 바라보더라도 이방인과 주민의 관점은 서로 아주 다르다. 이방인은 폭풍우 치는 바다를 찬양한다. 그러나 주민은 그 장면을 보면서 가까운 친척의 조난을 떠올린다.”)가 다큐멘터리처럼 생생하게 펼쳐진다. 만만하지 않은 등대 운영과 그것에 의지해 항해하는 뱃사람들의 애환, 이들의 생존에 무관심한 정부의 태도에 이르기까지, 소로의 가치관과 관심사가 한데 어우러진 작품이기도 하다.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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