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규종<br /><br />경북대 인문대학 노문학과 교수
▲ 김규종 경북대 인문대학 노문학과 교수

지난 11일 중국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국가주석과 부주석의 중임제한 철폐를 골자로 하는 개헌안이 찬성 2천958, 반대 2, 기권 3, 무효 1표로 통과됐다. 1978년 이래 개혁과 개방의 길을 걸어온 중국은 1인 통치의 위험성을 직시하고 1982년 헌법 개정에서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직책을 제외한 모든 직책의 중임제한을 명문화했다. 모택동의 개인우상화와 문화혁명이 가져온 궤멸적인 타격을 우려하여 집단지도체제와 국가주석의 임기제한을 못박아온 셈이다.

1958년부터 1960년까지 지속된 대약진운동 기간에 중국에서는 수천만이 아사(餓死)하는 참극이 발생한다. 제2차 5개년계획을 수립하면서 모택동은 `사회주의 건설의 총노선` 강령을 채택하여 중국 전역을 혼란의 도가니로 몰아넣는다. 세계경제대국 2위인 영국을 15년 안에 추월하겠다는 야심찬 기획으로 시작된 대약진운동. 하지만 중공업 우선정책과 거대수력 및 관개사업은 농업생산성과 생산량 하락을 야기하여 주민들의 대기근으로 이어진 것이다.

모택동은 대약진운동의 실패로 실각의 위기에 몰리자 1966년 이른바 `문화혁명` 구호를 내걸고 최고권력 장악과 대대적인 숙청을 시작한다. 우리는 10년 동안 진행된 문화혁명이 얼마나 오랜 세월, 얼마나 뿌리 깊이 중국 인민들의 삶과 영혼에 깊고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웠는지 알고 있다. 1976년 모택동 사망이후 이른바 4인방 척결과 개혁-개방으로 중국은 당시까지와 전혀 다른 노선을 지향하게 된다. 그것이 1982년 헌법 개정으로 이어진 것이다.

이번에 습근평의 개헌을 보면서 진시황과 10월 유신의 박정희가 떠오른 것은 나만의 소회일까! 장장 550년이나 이어진 춘추전국시대의 혼란을 딛고 기원전 221년 진시황은 중국최초의 통일왕조를 개창한다. 그가 통일대업에서 활용한 방책은 법가(法家)였다. 제자백가 백가쟁명 시기에 후진국 진나라를 부국강병의 길로 인도했던 상군(商君)의 법가책략을 고스란히 이어받은 것이었다. 거기서 비롯한 것이 `분서갱유`로 대표되는 사상과 철학의 억압과 숙정이다.

의약, 점복 (占卜), 농업을 제외한 서책을 불살라버리고, 황제를 비판하는 유생(儒生)들은 산 채로 묻어버린 것이다. 중국 최초의 제국을 수립하고 도량형과 문자생활을 통일한 시황의 업적은 작다고 할 수 없다. 그러나 그가 취한 극단적인 1인 통치와 무자비한 숙청은 진나라의 단명(短命)을 예비했다고 생각된다. 생각이 다른 사람들과 정치적인 반대파를 수용하지 못하는 협량(狹量)으로 대륙을 통치한다는 것은 어려운 노릇 아닌가.

거의 100퍼센트에 육박하는 찬성률에서 나는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체육관 선거로 대통령을 뽑았던 박정희를 떠올린다. 문맹이거나 대단히 소극적인 저항자 한둘 정도의 예외만을 인정했던 지독한 독재자 박정희가 습근평과 겹쳐진 것이다. 이번에 통과된 헌법에는 `국가감찰위원회` 설치안이 들어있다. 중국주석과 공산당에 반대하는 자는 누구든 감찰과 사찰, 구금과 투옥을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되는 형국에 이른 것이다.

절대적인 권력의 절대적인 부패는 필연의 결과다. 독선과 아집은 종당에 그것을 주창하고 실행한 개인과 집단의 돌이킬 수 없는 파멸로 귀착된다. 그것을 입증하는 것이 역사다. 전지(剪枝)가위를 들고 정원을 맴돌다보면 함부로 나뭇가지를 자르기 십상이다. 찬찬히 살피고 재삼재사 숙고하여 어디를 얼마나 자를 것인지 재단하지 않은 채 마구잡이로 가위질을 하기 쉽다는 얘기다. 독재는 문자 그대로 홀로 가위질을 해댄다는 의미다. 두려운 노릇이다.

2050년 세계최강을 꿈꾸는 중국몽의 선구자 습근평의 앞날이 그다지 밝아 보이지 않는다. 14억 인구대국 중국을 통치하는 것은 노자 말처럼 `생선을 뒤집듯 조심스럽고 또 조심스러워야` 하기 때문이다. 최고 권력자 1인의 손에 너무 많은 살상도구가 주어진다는 것은 예기치 못한 결과를 초래할 가능성이 크다. 습근평이 진시황의 불행한 전철(前轍)을 밟지 않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