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규종<br /><br />경북대 교수·인문학부
▲ 김규종 경북대 교수·인문학부

바야흐로 정치의 계절이다. 지난 5월 9일 대선이후 적폐청산과 조각(組閣)으로 분주한 문재인 정부 얘기만이 아니다. 영국 보수당은 총선결과 하원의석 12석을 상실하여 메이 총리 책임론과 `하드 브렉시트` 차질이 불가피하다. 프랑스에서는 신임 대통령 마크롱이 이끄는 신생정당 `앙마르슈`가 사회당과 자유당, 국민전선 등을 압도하고 약진하고 있다. `러시아 스캔들`로 곤욕을 치르고 있는 트럼프의 향후행보 역시 세계의 관심사다.

21세기 들어 경제뿐만 아니라, 정치에서도 불확실성이 가중되는 형국이다. 1980년대 중반 소련을 필두로 한 동구 사회주의 국가들이 줄지어 무너져갔다. 사회주의 장정 70년이 허무하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미국의 단일패권이 확립됐다. 그러나 21세기 들어 유럽연합 출범과 중국의 굴기가 세계정세에 근본적인 변화를 야기한다. 푸틴의 러시아도 10년의 인고(忍苦) 끝에 재기를 향한 시동을 걸기 시작한다.

이런 인식을 전제하고 보면 우리는 1987년 수백만 시민이 떨치고 일어나 이른바 `87체제`를 만들어냈다. `6월 항쟁`으로 명명된 봉기에서 시민들은 거리에서 광장에서 지하철에서 “독재타도, 호헌철폐, 직선쟁취”를 요구했다. 6월 10일, 6월 18일, 6월 26일 한국의 민주주의는 그야말로 변혁의 선봉에 서서 시대의 조류를 선도했다. 민주주의 역사를 새로 써내려간 6월 항쟁이었으나, 그 결과는 필설(筆舌)로 다할 수 없이 참담했다.

그리고 30년, 한 세대가 흐른 지난 3월 10일 우리는 다시 승리한다. 20차례에 걸친 촛불시위로 부패, 무능, 타락, 패거리주의로 무장한 대통령과 하수인들을 권좌에서 쫓아낸 것이다. 2016~17년의 투쟁과 승리의 주역은 이번에도 시민이었다. 연인원 1천685만에 달하는 이 나라의 민초가 남녀노소 불문하고 거리에서 광장에서 대통령 탄핵과 신질서를 외쳤다. `87체제` 당시처럼 이번에도 정당은 시야에 없었다.

한바탕 일장활극이 끝나서야 들이닥치는 영화의 경찰 패거리처럼 광장의 승리가 확정된 후에 정당은 슬며시 나타난다. 전리품을 챙길 시각임을 그들은 본능적으로 알아차린다. `87체제` 성립을 위해 산화해간 민주영령들에게 얼굴을 들지 못하게 만들었던 정당과 정치가들의 면면이 어제처럼 또렷하다. 그때 거리를 누볐던 청춘의 아들딸들이 이번에 쟁취한 승리를 헛되이 날려 보내서는 아니 될 일이다.

그것의 출발을 나는 정당정치의 부활에서 찾는다. 자신들의 기득권을 절대적인 것으로 인식하는 여야 정치권 인사들의 행각은 우울하기 그지없다. 소선구제와 지역정서에 기대어 혈연, 지연, 학연으로 권력을 지탱해온 자들. 토호세력의 후예로 가문과 연줄과 돈으로 권력을 장악해 개인의 영달과 가문의 영광에 헌신해왔던 자들. 그자들이 만들어낸 정치적 무관심과 염증이 청년들을 `헬조선`으로 몰고 가지 않았는가!

정당은 행정부와 의회권력을 장악해 그들이 추구하는 정강과 정책을 실현하려는 집단이다. 과연 우리나라에 이런 일반성에 기초한 정당이 존재하나, 하는 의문이 든다. 부패하고 타락한 언론과 결탁하여 국민들의 정치혐오를 극대화하고, 기득권 지키기에 골몰해온 자들의 집단이 아니었는지, 묻고 싶다. 그래서다. 정당정치의 복원을 새삼 주장하는 것은. 정치와 정책과 정당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증폭시키지 않으면 미래는 없다!

시민들이 차려준 잔칫상에서 흥청댈 것이 아니라, 시민을 위한 정책과 인사(人事)로 시민들의 고통과 슬픔을 치유할 책무가 정당에게 있다. 정당을 위한 시민이 아니라, 시민을 위한 정당으로 새로 태어나야 한다. 젊고 유능하며 야심만만한 신진기예가 정당에 참여하여 신바람을 불러일으키도록 길을 터주어야 한다. 최소 한 세대는 유지할 정도로 세력을 키워 나라와 민족을 위한 대도(大道)의 길을 걸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