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규종<br /><br />경북대 교수·인문학부
▲ 김규종 경북대 교수·인문학부

`넘사벽`이란 말이 있다. 아무리 노력해도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캄캄절벽을 뜻한다. 고어(古語)로는 `은산철벽(銀山鐵壁)`과 가까운 말이 아닌가 한다. 불가(佛家)의 선승들이 수행하면서 공안(公案) 하나를 붙들고 정진하다가 마주치게 되는 견고한 장벽(障壁)을 가리킨다. 행자가 아니라 해도 고단한 인생살이에서 맞닥뜨리게 되는 벽은 다채롭기 그지없다.

인류 역사에서 가장 길고 크며 오랜 역사를 가진 장벽은 만리장성이다. 혹자는 장성이 달에서도 보인다는 `구라`를 풀어 좌중을 숙연한 분위기로 몰고 갔다 한다. 중화세계는 전국시대부터 초원지대의 유목민인 융적(戎狄)에 대한 두려움으로 장성을 쌓기 시작했다. 기원전 771년 호경의 서주(西周)가 낙읍의 동주(東周)로 천도한 사건은 서융의 공격을 견디지 못한 까닭이다. 만리장성은 시황제 정(政)의 독자적인 사업이 아니라 역사적인 맥락을 가진 것이다.

중화의 서쪽에서 출몰했던 튀르크 계통의 융과 달리 장성의 북쪽에서는 흉노라 불리는 초원 유목민 세력이 강성했다. 단명했던 진제국의 뒤를 이은 한고조 유방은 기원전 202년 2월 `해하의 전투`에서 초패왕 항우를 격멸하고 황제를 칭한다. `초한지`의 근간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장성 북쪽의 장치세력 흉노와 `묵돌`에 대한 이야기가 빠져 있다. 중화를 중심으로 한 세계관에 익숙한 탓이다.

진시황이 죽은 지 1년 만인 기원전 209년 흉노의 선우(왕) 두만이 아들인 묵돌의 손에 죽음을 당한다. 권력을 찬탈하여 선우가 된 묵돌은 동호와 월지 등을 복속시키면서 세력을 확장한다. 흉노와 한은 기원전 200년 백등산(지금의 산서성 정양현)에서 맞붙는다. 이른바 `백등산 전투`다. 기병을 주력으로 한 묵돌의 유인작전에 걸려든 보병의 유방은 선우의 연지(왕비)에게 두둑한 선물을 주고 사지에서 가까스로 빠져나온다. 그 후로 한나라 황제들은 공주를 역대 선우의 연지로 바치고, 비단과 목화, 술과 쌀 같은 공물을 흉노에게 바쳐야 했다.

일본의 몽골역사 전문가 스기야마 마사아키는 백등산 전투를 세계사에 일획을 그은 사건이라 평가한다. 기동성과 집단성이 뛰어난 유목민의 기마 전사들을 보병중심의 군대로 적대할 수 없다는 사실이 명확해진 것이다. 따라서 백등산 전투는 흉노와 한이라는 두 제국의 전쟁이 아니라 유목민의 시대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일대 사변이다. 이런 양상은 근대서양이 촉발한 총과 탄약과 해양의 시대가 본격화되기 전까지 2천년 동안 지속되었다.

기원전 129년 한 무제가 시작한 흉노전쟁은 소제(昭帝)가 흉노와 강화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일단 마무리된다. 따라서 중원을 놓고 패권을 겨룬 항우와 유방의 이야기를 이해하려면 묵돌 선우와 흉노를 빼놓으면 안 된다. 오랜 대립과 항쟁에도 불구하고 전한과 후한시대는 대체로 흉노와 한이 남과 북에서 공존하게 된다. 투르크-몽골계통의 유목세계인 흉노와 한족이라 불리는 사람들의 농경세계인 한나라의 두 체제가 성립하게 된 것이다.

만리장성은 장성 너머의 오랑캐를 방어하는 목적보다는 장성 안에 사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었다. 장성 안쪽 혹은 아래쪽은 화하(華夏)의 세계이고, 그 너머는 야만의 땅이라는 차별과 의식의 벽이 만리장성이다. 그러나 장성에 자리한 관시(關市) 혹은 호시(互市)를 통해서 초원지대 농경지대의 산물은 교환되었고, 문화교류 역시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거대한 장벽으로도 막지 못하는 흐름이 있었다는 얘기다.

초원 유목민이 세운 돌궐제국의 창시자 돈욕곡은 기막힌 명언을 남긴다. “성을 쌓고 사는 자, 기필코 망할 것이며, 끊임없이 이동하는 자, 그가 살아남을 것이다.” 21세기 `노마드` 시대를 살아가면서 생각해볼만한 구절이 아닌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