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규종<br /><br />경북대 교수·인문학부
▲ 김규종 경북대 교수·인문학부

시드니 포와티에 주연영화 `초대 받지 않은 손님`은 흑백의 결혼문제를 다룬다. 교양 있고 지성적인 흑인의사와 청순하고 재기발랄한 백인처녀가 맺어질 수 있겠느냐, 하는 줄거리가 핵심이다. 영화가 개봉된 때는 미국에서 흑인이 백인과 결혼할 수 있는 권리가 공식적으로 부여된 원년인 1967년이었다. 공교로운 일치다. 하지만 불과 1년 후 인종차별에 저항하고 인종화합에 앞장섰던 마틴 루터 킹이 암살당한다.

`검은` 색과 `검은` 것에 대한 백인들의 혐오와 공포가 만들어낸 비극이었다. 아메리카의 흑인들은 제국주의가 불러온 것이다. 값싼 노예노동으로 최대의 이윤을 챙기려 했던 백인들의 더러운 욕망이 야기한 인신매매의 결과다. 백인들은 흑인들을 인간 이하로 생각했고, 그런 관념은 남북전쟁(1861~1865) 이후에도 뿌리깊이 살아남았다. 언론에 보도되는 백인경찰의 비무장 흑인청년 살해나 구타는 연원이 깊고도 너른 것이다.

밤과 어둠, 암흑에 대한 동물적인 두려움과 기피가 검은색에 불온한 딱지를 붙였는지 모른다. 그러나 계몽주의와 과학기술혁명, 민주주의 확산 이후에도 검은색과 검은 피부에 대한 혐오가 지속됨은 인간의 본능이 진화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우리 조상들은 양자의 대결보다는 조화를 찾으려 한 듯하다. “까마귀 노는 곳에 백로야 가지마라!”했던 선비가 있었지만, “까마귀 검다 하고 백로야 웃지 마라!”고 백로를 비난한 선비도 있었으니 말이다.

기억에 남는 명구(名句)는 등소평의 `흑묘백묘론`이다. 검은 고양이든 하얀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는 주장이다. 거기 담긴 함의는 자본주의든 사회주의든 중국 인민들의 배만 채워주면 그만이라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목도하는 중국굴기의 단초를 제공한 등소평의 유연한 사고는 배움직하다. 그것을 나는 바꿔 말한다. “나는 원칙을 타협하지는 않지만, 타협한다는 원칙은 가지고 있다.” 원칙고수보다 더 중요한 것은 결과 아닌가?!

나라안팎을 엉망으로 들쑤시는 `최박게이트` 때문에 정유년 벽두부터 우울하다. 근자에 회자되는 문화계 블랙리스트로 심사가 더욱 편하지 않다. 1만명에 달한다는 문화-예술계 인사의 목록에도 끼지 못했으니 “내가 이러려고 국립대 교수질을 했나” 하는 자괴감마저 든다. 청와대와 정부의 관제행사와 사업에 비판적인 인사들을 예외 없이 얽었다니 기가 막힌다. 반대자들의 사상검증을 광명천지 21세기에 감행한 시대의 희화(戱畵)가 아닐 수 없다.

1천만 관객의 `변호인`(2013)과 `광해`(2012)마저 그 사슬에 걸려들었다니 놀라운 일이다. 외국인과 재외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상영에서 `천안함 프로젝트`(2013)와 `변호인`, `광해`를 금지했다는 언론보도가 나왔다. 노무현 대통령을 주인공으로 삼은 영화에 권부 실세들이 반감을 가지는 것은 일견 당연해 보인다. 국민들의 아낌없는 지지와 성원을 받은 전직 대통령에 대한 열등감과 열패감, 시기와 질투에서 비롯한 치기어린 사감(私憾)의 발로일 테니까.

`광해`까지 상영을 금지한 것은 뜻밖일지 모르겠다. 500년 전 환란의 시대를 살다가 비운을 맞이하여 군왕의 호칭마저 빼앗긴 광해! `광해`는 조선의 백성들뿐만 아니라 21세기 국민들이 바라는 최고 지도자의 덕목을 환하게 밝힌다. 그것은 가난하고 헐벗고 주린 백성들을 위한 정책집행과 자주적인 외교를 실행하는 것으로 요약 가능하다. 옹졸하고 졸렬하며 무능하고 부패하며 타락한 권력자와 부역자들의 금지와 칼질이 참 고약하다.

국가권력의 실행이란 반대자들을 포용하는 것에 요체가 있다. 권력자와 생각과 정서와 이념이 다르다고 해서 그들을 적으로 돌리는 짓이야말로 유아기의 단계에 머물러 있는 어리석은 행위다. 그런 자들이 만들어내고 유포한 블랙리스트가 득세하는 암울한 시기를 우리는 경험하고 있다. 어쩌면 블랙리스트의 대상영역과 범위가 확장될지도 모를 일이라 한다. 그 어느 곳에 내 이름자가 오롯 자리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