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규종<br /><br />경북대 교수·인문학부
▲ 김규종 경북대 교수·인문학부

한 조각 빵을 훔치려다 19년 옥살이를 해야 했던 장발장. 절도와 가택침입죄로 5년, 네 차례 탈옥기도로 14년, 도합 19년의 수형(受刑) 생활. 위고가 예수 탄생 이후 최대의 역사적 사변이라 격찬했던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은 죄수 장발장에게 아무것도 가져다주지 않았다. 그가 여덟이나 되는 굶주린 조카들 때문에 절도(竊盜)를 감행한 때는 1795년 겨울, 수감된 것은 이듬해 초, 가석방된 시기는 1815년이었다. 대혁명 발발 이후 26년 만에 그는 출옥한다.

혁명은 위대했으되, 시간과 더불어 세상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하나의 세대가 꼬박 바뀌는 동안 지배질서는 눈곱만큼도 요동(搖動)하지 않은 것이다. 낭만주의자이자 학술원 회원이었던 위고가 주목하는 지점이 여기다. 어째서 혁명은 최하층 민중 장발장과 그의 불우한 이웃들에게 아무것도 가져다주지 않았을까?! `레미제라블`의 요체(要諦) 가운데 하나는 이런 모순적인 상황의 문제제기에 있는지도 모른다.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혁명이었는가?!

위고는 1815년 출옥한 장발장의 행적(行蹟)을 따르면서 1832년 6월 5~6일 봉기까지 그려냄으로써 격변의 시대를 조명한다. 시대와 불화하면서 장발장은 미리엘 주교와 자베르 경감, 그리고 코제트와 조우하면서 인생의 비의를 깨달아간다. 소설 곳곳에서 위고는 자신의 사유를 끝까지 밀고 나가는데, 국민의회 의원 지(G)와 주교의 대화는 특히 흥미롭다. 루이16세의 처형과 사형제도, 혁명의 폭력성에 대한 양자(兩者)의 대화는 긴장과 역동성으로 가득하다.

무엇보다 독자는 자베르와 장발장의 악연(惡緣)과 대결에서 눈을 뗄 수 없다. 위고는 그들을 선명하게 구분한다. `법률의 포로捕虜)` 장발장과 `법률의 노예(奴隸)` 자베르. 우연한 범법(犯法)으로 법률의 포로가 됐다가 법률로부터 해방되는 장발장. 타고난 법률의 노예이자 가진 자들의 충견(忠犬)으로 살아오다 장발장으로 인해 속절없이 무너져 자살하는 자베르.

우리는 2016년 11월과 12월 세계사적인 대변혁의 주인공으로 나날을 살아간다. 한국인들은 한낱 보잘것없는 60대 여성의 농단으로 불거진 한국사회의 난맥상을 극복해 변혁과 혁명의 역사에 획을 더하고자 한다. 그 최초의 빌미를 제공한 자는 `권력의 노예`이자 현직 대통령이다. 이른 시절부터 권력에 복무해온 경험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던, 뼛속까지 권력에 노예화한 인간으로 평생을 살아온 인간의 무표정한 원형질(原形質)과 우리는 대면하고 있다.

권력의 노예를 자유자재로 부려온 `권력의 포로`는 지금 수인(囚人)이 되어 자신의 범죄사실을 모두 부인(否認)한다. 모든 것이 허위(虛僞)고 가짜이며 조작됐다고 주장한다. 권력의 노예는 권력의 포로가 자행한 농단이 1% 미만이라고 강변(强辯)한다. 권력의 노예와 권력의 포로가 내뱉는 언어와 사기행각에 온 국민의 일상이 희화화(戱畵化)된 21세기 대한민국. 이 지점부터 우리의 형안(炯眼)이 절실하다. 어디로 어떻게 출구를 찾아 나설 것인가, 그것이 관건이다.

1832년 6월 파리봉기는 처절하게 실패한다. 민중은 문을 닫아걸고 혁명가들을 방기(放棄)한다. 민중은 필요한 만큼만 움직이는 법. 2016년 한국인들이 어디까지 움직일 것인가, 여기에 세계시민들의 눈과 귀가 쏠려있다. 기막힌 역사의 소용돌이를 극복하는 시민혁명의 길과 우회로(迂廻路) 앞에서 회군(回軍)한 87체제의 도돌이표 앞에 우리는 서있다.

곧 병신년이 가고 정유년이 오고, 이어서 2018년 무술년이다. 위태로운 잔나비 칼춤의 끝을 용감한 수탉이 목 놓아 노래하고, 충직한 개가 새로운 시대의 서막(序幕)을 든든히 지키는 첨병(尖兵)이 된다. 그러하되 사악(邪惡)한 시대의 종언과 부역자 무리의 잔당은 쉽게 그 자리를 놓지 않는 법. 하여 우리는 병신년 마지막 날까지 권력의 노예와 포로들이 현란하게 벌이는 칼춤의 향연을 주시(注視)할 노릇이다. 그러하되 정유(丁酉)의 봄은 과히 멀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