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규종<br /><br />경북대 교수·인문학부
▲ 김규종 경북대 교수·인문학부

“거룩한 분노는/ 종교보다도 깊고/ 불붙는 정열은/ 사랑보다도 강하다/ 아, 강낭콩 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논개` 1연).

수주(樹州) 변영로(1897~1961)의 절창(絶唱)이다. 진주 촉석루에서 왜장의 목을 끌어안고 남강으로 투신한 논개를 떠올리며 지은 시다. 강낭콩과 양귀비의 대비(對比)도 그렇지만 푸른 물결과 붉은 마음이 어우러져 대조적인 색채와 함께 조화를 선사한다. 하지만 내가 주목하는 것은 첫 번째 구절이다. 종교보다 깊은 거룩한 분노! 시인은 어떤 분노를 생각했을까?! 거룩한 분노는 어떤 형상과 내용을 가지고 있을까, 하는 궁금증이 오래전부터 있었다.

인간의 욕망과 감정을 체계화해 일컫는 오욕칠정(五慾七情)이나 사단칠정(四端七情)에서 분노는 한 자리를 차지한다. 어떤 선인(先人)은 수오지심(羞惡之心)에서 분노가 촉발된다고 보았다. 수오지심은 부끄럽게 여기고 수치스럽게 여기는 마음을 일컫는다. 분노가 수오지심을 근원으로 삼는다면, 논개는 왜적의 침략과 행악질에서 남다른 부끄러움과 수치심을 느낀 여성이다. 자신의 목숨과 맞바꿀 만큼의 분노를 몸소 실천궁행 (實踐躬行) 했으니 말이다.

그런데 시인은 분노를 형용하는 수식어 `거룩한`을 덧붙여 놓았다. 인간을 만들고, 인간이 만든 신(神)을 대상으로 하는 종교보다 더 깊은 `거룩한` 분노. 나는 그것을 가늠하기가 쉽지 않다. 망국의 한이나 왜적의 침략을 몸소 경험하지 못한 때문이려니와 시인의 감수성을 따라잡지 못하는 태생적 한계에도 근거는 있을 터. 하되 1922년에 발표한 `논개`에는 실패로 돌아간 3·1 만세운동의 안타까운 회한(悔恨)이 서려있던 것은 아닐까?!

2016년 11월 대한민국은 분노로 들끓고 있다. 거리와 광장에서 분노의 함성이 들린다. 대구와 부산, 광주와 서울 같은 대도시에서만 들리는 것이 아니라, 중소도시와 촌구석에서도 분노의 목소리와 장탄식이 끊이지 않는다. 이참에 회자(膾炙)되는 구절이 “이게 나라냐”하는 것이다. 불과 다섯 글자로 드러난 민심의 표출은 점입가경(漸入佳境)이다. 21세기 4차 산업혁명의 칼바람이 지구촌을 강타하는 시점에 터져 나오는 “이게 나라냐” 하는 분노.

급기야 중고생들마저 `혁명정권`을 현수막에 내걸었다. “중고생이 앞장서서 혁명정권 세워내자!” 햐, 이건 또 뭐냐, 하는 분노와 한숨이 터진다. 10대 초중반 되는 아이들마저 거리로 내모는 정권의 참상이 분노를 부른다. 부패 무능 타락 패거리주의로 중무장한 대통령과 그 졸개들이 무당의 추임새에 맞춰 작두 위에서 칼춤 추는 나라! 어쩌다 이 나라를 저런 망나니들에게 넘겨서 어린것들을 거리로 내몰고 있나, 하는 자괴심에서 생겨나는 한숨!

나는 거리에서 광장에서 지하철에서 분노하고 절망하며 탄식하는 이들에게 `거룩하기`를 권하고자 한다. 시인이 노래한 `종교보다도 깊은` 거룩한 분노를 가슴 깊이 새겨두기를 바라는 것이다. 내세(世)의 구원과 영생(永生)을 기원한다는 종교보다도 더 깊은 분노의 염(念)을 골수에 새긴다면 이런 망국적인 정권과 하수인들의 재등장은 우리 역사에서 다시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끝장내야 할 때 끝장내지 못하면 질질 끌려 다니는 법이다.

그들의 행악질을 역사의 관 속에 묻고 대못 쳐서 다시는 빛을 보지 못하도록 해야 우리 후손에게 재앙이 되풀이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시인처럼 거룩한 분노를 간직해야 한다. `성스럽고 위대한` 분노를 국민 모두 새겨서 2016년 11월을 축제와 승리의 마당으로 인도해야 하리라. 그것이 미완의 3·1 만세운동을 기억하는 시인의 `논개`를 되살리는 일인지도 모른다. 분노하라! 하지만 거룩하게 분노하라!